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728x90

[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유대인들의 공회는 이른 새벽에 모였다(눅 22:66). 대제사장들은 그 새벽에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함께 의논하고 예수님을 정죄한 후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예수께서는 죄수처럼 결박을 당한 채 총독의 법정에 서셨다. 당시에 유다 나라는 로마 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로마 총독의 판결이 필요하였다. 특히 사형의 경우 그러하였다. 요한복음 18:31에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다.

[2절]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길 때 정치적 죄목을 걸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로마 제국에서는 가이사 황제가 왕이며 또 그가 유대 나라에 세운 헤롯 외에 다른 왕이 있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면 그것은 가이사를 대항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19:12에 보면, 유대 지도자들은 과연 이런 논리로 빌라도를 몰아붙였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3-5절]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소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가로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저희가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소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악한 자들은 의로우신 예수께 대해 많은 비난거리를 만들어 빌라도에게 말했지만 예수께서는 그것들을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즉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셨다. 빌라도는 그것을 기이히 여겼다. 사실, 저 악한 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뜻을 정하였다.

[6-10절] 명절을 당하면 백성의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前例)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무리가 나아가서[소리치며] 전례대로 하여주기를 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의 시기로 재판정에 오게 되었고 실상 죄가 없음을 알았고 그를 놓아주기를 원하였다.

[11-14절]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선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무리들은 참으로 무지하고 무정하였고 불의하고 배은망덕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권력자들 앞에 아부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총독 빌라도는 백성의 여론에 몰려 불의하고 비양심적인 판결을 내렸다. 그는 예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잘못된 판결을 한 것이다. 그는 악인들의 죄들 때문에 정죄되셨다. 죄 없으신 그가 죄인들 때문에 정죄되셨다. 그 대신에, 살인자 바라바가 풀려났다. 주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고 그 대신, 한 죄인이 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16-20절]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조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께서는 총독 빌라도에 의해 정죄되시고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 군인들에게 조롱을 당하셨다. 자색 옷은 왕의 복장을, 가시 면류관은 왕의 금관을 흉내낸 것이라고 보인다. 예수께서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군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를 조롱하였다. 조롱을 다한 후 군인들은 그에게서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그를 끌고 나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불경건한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조롱을 당하셨다.

[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마 27:32 각주를 참조)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십자가는 거기에 달릴 죄수가 사형장까지 지고 가는 것이 로마의 사형 집행 규정이었던 것 같다. 구레네 시몬은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잡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형틀을 같이 지었다고 본다. 본문이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증거하는 것은 뜻이 있어 보인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로마서 16:13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말했는데, 그 루포가 아마 본문의 루포일지 모른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는 그 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의 자녀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불평스럽게 억지로 했을 것 같은 그 봉사가 자신과 온 가족이 예수님 믿고 구원의 복을 받는 기회가 된 것이다.

[22-23절]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해골의 곳’이라는 뜻인 ‘골고다’는 그 언덕의 모양이 사람의 머리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인다. 군인들은 예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 마태는 ‘쓸개 탄 포도주’라고 기록하였다(마 27:34). 그것은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들에게 그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주는 ‘쓰고 신 포도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포도주를 받지 않으셨다. 우리를 위해 자원함으로 십자가를 지시는 그는 십자가에서 당할 고통을 피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24절] 십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당시의 십자가 처형 방식은 양팔과 손을 펴서 각각 못박고 양발을 포개어 못을 박는 것이었다고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눅 24:39), 그는 분명히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셨다. 군인들은 또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다 취했다. 예수께서 이렇게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겉옷과 속옷을 다 빼앗기신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시편 22:16, 18은,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라고 예언하였다.

[25-26절] 때가 제3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마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시각을 증거했다. ‘제3시’는 오늘날의 아침 9시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새벽에 유대인의 공회에서 심문받으시고 빌라도 법정으로 이끌려 가셨다(마 27:1; 막 15:1; 요 18:28).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시각이 제6시라고 기록한다(요 19:14). 그것은 오늘날의 시간과 같이 오전 6시를 가리킬 것이다. 그의 십자가 형틀 위에는 히브리어와 로마어[라틴어]와 헬라어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죄패가 달려 있었다(요 19:20; 눅 23:38 전통본문).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 메시아이심은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27-28절]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가 불법자들과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는 성경이 응하였더라](전통본문).

예수께서는 두 강도들 사이에 죄인들 중 한 사람처럼 나무에 달리셨다. 28절(전통본문)은 이사야 53:12에 예언된 말씀이다. 의인이신 예수께서 극악한 죄인처럼 취급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곧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속죄제물이셨다.

[29-30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이것이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 할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시편 22:6-8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이었다. 거기에 말씀하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31-32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조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긴다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이처럼 무정하고 비양심적이며 사악할 수 있는가. 그들은 지금이라도 후회하며 예수님을 측은히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종교적 형식과 사람의 인격은 근본적인 연관이 없는 것 같다. 종교적 형식을 가진 자라도 이렇게 악한 자가 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격의 변화이다. 구원은 죄인들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33절] 제6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더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6시부터 제9시까지, 즉 오늘날 시간으로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 어두움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슬픈 일, 즉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일을 행하였고 어두움의 권세가 이긴 것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증거할 것이다. 또 그 어두움은 하나님의 크신 슬픔과 노여움을 증거했고, 또 아마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무서운 재앙과 불행을 예시할지도 모른다.

[34절] 제9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리마](전통사본)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에게만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불에서,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내셨으나,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틀에서 건져주시지 않았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죄를 담당하신 속죄제물이셨다.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요 1:29). 구약시대에 행해져 왔던 짐승 제사 제도는 메시아의 대리적 속죄를 예시(豫示)했다. 구약의 짐승 제물들은 메시아의 모형으로 죄인들을 대신하여 피흘려 죽임을 당하고 불태워졌던 것이다. 이사야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예언하였다(사 53:5-6).

[35-38절]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하신 말씀은, 요한복음의 증거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을 것이다(요 19:3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택자들의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우리의 완전한 대속(代贖)을 이루셨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것은 이제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0:19-20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요 14:6) 천하 인간이 그로 인해 구원 얻을 유일한 이름이시다(행 4:12).

[39절]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외치시며](전통본문)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고백이었다. 진리의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 세상에 다 함께 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이 있고 단지 죄의 낙이나 누리다가 허무하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자가 있다.

[40-41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좇아 섬기던 자요 또 이 외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더라.

남자들이 대부분 다 도망쳐버린 때에도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인들이었다. 요한복음 19:25는 그 여자들 중에 그의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고 증거한다. 성경에 보면, 여자들은 때때로 남자들보다 열심과 충성된 마음이 더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며 복음 사역에 수고하고 협력한 일이 많았다(눅 8:2-3; 롬 16:1, 3, 6, 13).

[42-47절]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아리마대 요셉을 예비하셨고 그를 사용하셨다. 요셉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했고 공회에서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없다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 자이었다(눅 23:51). 그러나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요셉은 그의 시신을 장사 지내드리는 것이 그에게 대한 마지막 예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세마포를 샀고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다가 아마 물로 닦고 세마포로 쌌고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그를 장사했다(마 27:60). 예수님은 죽어 무덤에 내려가시기까지 심히 낮아지셨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버림을 받으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자들의 대속(代贖)과 완전한 의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셨다. 성전의 휘장은 찢어졌고 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와 즐거이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다시는 죄 가운데 머물지 말고 그를 사랑하며 그의 말씀, 곧 성경의 모든 교훈에 순종해야 하고 오직 의와 선과 진리의 도구로만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슬픔과 절망의 날에도 하나님을 위하는 자들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섬기며 따르던 자들과 그 외에도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제자들이 다 두려워 도망친 그때에 그들은 비록 멀리서지만 십자가를 주목하고 있었다. 또 존귀한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있었다. 그는 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자신의 새 바위 무덤에 장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그를 사용하셨다. 우리는 어두운 날에도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