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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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은밀히]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民擾)[백성의 소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 14일 저녁이었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7일 간이었다(레 23:5-6). 이 두 절기는 때때로 동일시되기도 한다(눅 22:1).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때 유대인들은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대문틀 위 아래와 양옆 기둥에 발랐다. 유월절 어린양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3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사건은 요한복음 12장에 기록된 사건과 같은 사건인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고 이틀 전에 이 일이 있었다. 향유를 부은 여자는 나사로의 여형제 마리아일 것이다. 그는 자기가 간직하고 있던 매우 값진 순전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께 부었다. 그 향유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본문 5절과 요한복음 12:5에는 그것이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3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300일 품삯에 해당하고, 하루 품삯을 10만원만 치면 약 3,000만원이 되는 가치이다. 그것은 분명히 그 여자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결혼을 위해 준비해둔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그것은 자기의 몸에 바르기 위해, 자기의 육신적 아름다움과 단장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일 것이다.

[4-5절]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 여자가 깨뜨려 부은 그 값비싼 향유가 쓸데없이 낭비된 것이었는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여자를 책망한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고 돈궤를 맡은 자로서 거기 든 것을 훔쳐가는 도둑이기 때문이었다.

[6-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아니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의 행동의 동기를 보신다. 그는 선한 동기로 하는 행위를 귀히 보신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해심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다. 물론 가난은 반드시 환경이나 사회구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고, 많은 경우 게으름과 낭비와 과도한 욕심 때문에 온다. 우리는 쉽게 부자 되려 하지 말고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선한 일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아무 때라도 그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몇 일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그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다.

[8-9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그 여자가 자기의 가진 가장 귀한 보화를 주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였을 때 우연하게도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한 일을 귀하게 여기시고 칭찬하셨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고, 그 여자의 한 일이 복음이 전파될 세상의 모든 곳에서 알려져야 할 모범이라고 암시하셨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많은 구제보다 귀한 일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에서 나온 지극히 높은 숭앙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10-11절]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많은 제자들 중 열두 명의 수에 든 자이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의 은혜로운 말씀들을 들었고 그의 선한 인품과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자가 되었다. 유다가 배신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돈을 사랑했고 돈을 훔치곤 했었다. 요한복음 12:6,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6:64) 마침내 마귀의 이끌림을 받았다고 증거한다(13:2).

[12-14절]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전통사본에는 없음)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

유월절은 1월 14일 저녁이고, 무교절은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간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루를 해질 때부터 다음 해질 때까지로 보기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의 첫날은 오늘날 우리의 개념으로 보면 같은 날 저녁이다. 그 두 날은 때때로 동일시되었다.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는 누가복음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눅 22:8).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명령을 하신 것은 그의 신적 지식을 증거한다.

[15-16절]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의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필요한 것을 준비하셨다. 하나님께 헌신된 한 성도를 통해 큰 다락방이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종들의 필요한 것을 준비하신다. 이것은 주의 종들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 우리는 의식주를 염려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바로 살고 죄 짓지 말고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17-20절]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배신하리라] 하신대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집에 들어가 예비된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저녁식사를 준비하였다. 날이 저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함께 앉아 식사를 하셨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배신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한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자이며 마침내 그를 배신할 자이었다.

[21절] 인자(人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가치가 단순히 출생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사람으로 출생했다는 것이 반드시 가치 있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았다. 그에게 있어서 사람으로 출생했다는 사실이 복이 아니고 오히려 화이었다. 그것은 특히 사후에 심판과 지옥 형벌이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히 9:27; 계 21:8).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22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그들이 유월절 저녁식사를 할 때에 예수께서는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으라[받아 먹으라](전통사본).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 말씀은 그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였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 떡 속에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비유적인, 상징적인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 떡은 분명히 실제 떡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떡을 떼어 나누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찢겨지실 것이다.

[23-24절]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새 언약]의 피니라.

예수께서는 또 잔을 가지고 감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그것을 마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 이 말씀도 역시 그 포도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된다거나 그 포도즙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17:11).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를 상징했다. 그것은 속죄의 피이었다. 유월절 저녁식탁에서의 포도즙은 그런 의미를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많은 사람을 위해, 그들의 죄사함과 영생을 위해 흘리는 새 언약의 피이시며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는 피이시다.

[25-26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주 예수께서는 또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요 14:6). 천국에서는 즐거운 잔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주님과 함께 즐거이 음식을 들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 후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갔다.

[27-28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것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구약 스가랴 13:7에는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시 살아나실 것과 그런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갈릴리에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갈릴리에서 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전도자의 사명을 처음 받았던 갈릴리에서 그들의 사명감을 다시 새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29-31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주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연약하여 실패할 것을 알고 계셨다. 주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두 번의 고백은 진심의 고백이었을 것이다. 죽을 각오를 가졌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자는 훌륭한 제자임에 틀림없다. 베드로만 그런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했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다 주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50절). 또 베드로는 그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일은 모든 성도들 곧 우리의 의지의 연약함을 보인다.

[32-34절]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헤 프쉬케 무 hJ yuchv mou)[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성밖 골짜기 너머에 있는 동산이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자주 기도하셨고 열두 제자들을 세우실 때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눅 6:12-13).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도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때 그는 심히 놀라며 슬퍼하시며 “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예수님의 고통스런 모습을 본다. 십자가 형틀은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도 그 위기의 밤을 잘 이기려면 깨어 기도해야 했다.

[35-36절]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잔’은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리는 고난을 말한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소원은 인간 예수님의 마음의 불안과 고통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그의 순종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사람의 뜻보다 훨씬 선하다. 그것은 세상에서 최선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

[37-38절]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시간]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토 프뉴마)[영]에는 원이로되 육신(헤 사르크스)[몸]이 약하도다 하시고.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깨어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면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시험을 이기는 길은 깨어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또 “영은 원하되 몸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영의 활동은 마음으로 표현되므로 이것은 영과 몸의 대조이며 또한 마음과 몸, 즉 심신(心身)의 대조이다.

[39-42절]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저희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人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께서는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다시 오셔서 보시니 그들이 자고 있었다. 그 밤에 그의 기도는 동일한 내용이었다. 그 기도는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아마 약 세 시간의 기도이었을 것이다. 그가 한번의 기도가 끝날 때마다 와서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3-47절]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많은] 무리가 검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랍비여, 랍비여](전통사본) 하고 입을 맞추니 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인간 관계에서 입맞춤은 일반적으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지만,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속이는 입맞춤이었다. 그것은 파송된 군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확실히 잡게 하는 신호이었다. 요한복음은 곁에 섰던 자 중에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린 자가 베드로이었고 그 종의 이름이 말고임을 증거하였다(요 18:10).

[48-50절]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몽둥이]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큰 죄인처럼 잡히는 일이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잡히셨다. 그때 그의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했다. 그것은 제자들의 진심의 결심대로 되지 않았고 “너희가 다 이 밤에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대로 된 일이었다. 그들은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고백했었다.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었다(31절). 그러나 그 위협과 공포가 있었던 현장에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하였다.

[51-52절]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청년들이 그를 잡자](전통본문)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 청년은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 중요한 책에 그 의미 없어 보이는 부끄러운 일을 기록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가는 유월절 식사 후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까지 왔던 것 같다. 여하튼 베 천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는 말은 그때의 두려운 분위기를 증거해준다.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라도 그런 때에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라도 그런 위기 상황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53-54절] 저희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이었다(마 26:57).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산헤드린 공회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최고회의의 의원들이었다. 그 새벽에 그들이 다 모인 것을 보면, 그 회의는 예수님을 정죄하여 죽이는 일을 의논하기 위해 소집된 계획된 회의이었다.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의인(義人)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죽이려 할 정도로 극도로 부패해 있었다.

[55-59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정죄할 증거들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죽을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14:1의 증거대로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뜻을 정하였고 계획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 대해 거짓 증거하는 자들은 많았으나 그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만한 증거를 확보할 수 없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거짓되이 정죄하려 하였고 거짓 증인들은 그를 거짓되이 비난했다. 그러나 거짓 증거는 마귀의 죄이며(요 8:44) 제9계명을 범하는 죄요 지옥갈 만한 큰 죄요(계 21:8) 천국 들어가지 못할 죄이다(계 21:27; 22:15). 잠언 19:5는,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고 말하였다.

[60-62절]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人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공회 앞에서 자신의 신분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하여 잠잠하실 수 없었다. 그 질문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묻는 중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은 꼭 필요한 때에 말씀하셔야 했던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또한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신 것이다.

[63-64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예수님의 증언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으며 그 증언이 참람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한 증거라고 간주하였다. 공회원들도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했다. 누가복음에 보면,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그들의 결의에 반대하였다(눅 23:50-51).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한 것은 이성적으로 바른 판단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실 수 없다는 증거를 제시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그가 무슨 죄를 지으셨다든지, 그에게 어떤 거짓된 일이 있으셨다든지, 혹은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는 등의 증거들이 있어야 하였으나 그런 증거들은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본장 55절은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부당한 재판과 정죄를 받으셨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는 아무런 반증(反證)도 없이 그를 정죄한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65절]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고 그를 멸시하였다. 불경건하고 악한 세상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이와 같이 학대하였다. 예수께서는 이전에 제자들이 선생보다 더 낫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마 10:24). 그러므로 그의 제자된 우리도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매맞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66-68절]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비자(婢子)[여종] 하나가 와서 베드로의 불 쬠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마침 닭이 울더라.]

베드로의 부인(否認)은 육신의 목숨을 위한 비겁한 거짓말이었다. 그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이전의 그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행위이었다. 그는 주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저버렸다. 그것은 사람의 부끄러운 연약함이었다. 3년 간의 제자훈련이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킬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마침 닭이 울었다. 이것은 첫 번째 닭의 울음이었다. 베드로는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후 앞뜰로 나갔다. 앞뜰은 입구 쪽을 말한다. 그것은 그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69-70절] 비자[그 여종](원문)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 하되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너는 갈릴리 사람이며 네 말씨가 그러하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전통본문).

‘그 여종’은 처음 여종을 가리켰다고 본다. 두 번째 말한 사람에 대해 복음서들은 ‘다른 여종’(마 26:71), ‘다른 사람’(눅 22:58), ‘사람들’(요 18:25) 등 다양하게 말한다. 두 번째는 그 처음 여종을 포함하여 다른 한 여종과 또 남자들이 함께 말했다고 보인다.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했다. “너는 갈릴리 사람이며 네 말씨가 그러하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마태와 마가의 증거는 동일하지만, 누가는 “또 한 사람이 말했다”고 증거하고(눅 22:59), 요한은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말했다”고 증거한다(요 18:26). 이때도,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말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 특히 대제사장의 종 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71-72절]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였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참으로 철저한 부인(否認), 철저한 비겁과 불신실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큰 죄이었다. 그때에 닭이 곧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울었다.

그는 심히 통곡하였다(마태, 누가).사도 베드로는 그 날 밤 한 여종과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그것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부인한 것은 큰 죄이며 참으로 비겁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써 충성되고 능력 있는 증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핍박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주를 증거했다(행 4:8, 19-20, 31; 5:40-42). 오늘 우리도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써 죽도록 충성하는 증거자들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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