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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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스가랴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했었다(슥 9:9). 이것은 메시아 예언이라고 본다. 

[3-6절]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호 퀴리오스)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은 나귀의 주인이 있지만, 실상 예수께서 나귀의 참 주인이심을 증거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지만, 실상 세상의 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세상의 창조자요 참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24:1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말하였다.

[7-10절]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리들의 찬송은 호산나 찬송이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시편 118편에 있는 말씀이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호쉬안나이다.예수께서는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사람들을 각가지 불행에서 구원하실 수 있고 구원하실 것이다.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특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대속(代贖) 사역을 예표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성으로 올라가신다. 그는 거기에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정죄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죄와 죄의 결과인 모든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다.

[12절]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예수께서 배가 고프신 것은 그의 인성(人性)의 표시이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 본질을 가지셨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가 사람이 되신 것은 신비롭고 놀라운 기적이다. 또 그가 그 아침에 배가 고프신 것을 보면,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를 잘 대접했던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합당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13절]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는 신성(神性)으로는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인성(人性)으로는 지식의 제한성을 가지고 계셨다고 보인다. 무화과는 잎사귀가 생기면서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서 보신 그 무화과는 잎사귀만 있고 아무 열매가 없었다. 이것은 당시의 형식적 종교와 같았다. 그것은 형식은 있으나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 없는 자들, 성경책을 갖고 다니고 기도하며 찬송하며 교회의 직분도 있으나 참되고 진지한 마음과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이 없고, 도리어 거짓과 탐욕, 미움과 음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을 버리고 종교적 형식만 가지지 말고 선한 열매를 맺는 성도, 곧 참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과 삶을 가진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14절]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선한 열매 없는 당시의 형식적 종교 지도자들을 정죄하시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나무들 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도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나무들은 찍어 버리신다. 세례 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었다(마 3:10). 예수께서도 포도나무 비유에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2).

[15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성전은 성전뜰과 성소와 지성소(至聖所)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세 부분은 다 거룩했다. 본절의 내용은 성전뜰에서의 광경이라고 본다. 거룩한 성전뜰이 일종의 장터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제물을 사고 파는 일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과 결탁된 장사꾼들은 성전을 돈벌이의 장소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평소에 대체로 온화하셨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성전이 더러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케 하려는 예수님의 열심이 그를 삼켰다. 그는 성전 안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내어쫓으셨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6절] 아무나 기구[물건]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을 더럽히고 거기에서 세속적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다. 오늘날 교회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딤전 3:15). 교회의 설교들과 교훈들과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거룩해야 하고 세상적인 것이 섞여서는 안 된다.

교회의 교훈은 육신적 문제나 물질적 문제, 즉 병고침이나 물질적 복을 받는 일에 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활동도 거룩해야 한다. 

[17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섬기는 곳이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요 2:21) 또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예표하였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듯이, 신약교회도 모여 하나님을 섬기며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교훈이 있고 하나님의 일들을 수행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당시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셨다. 성전에서의 매매의 행위는 사람들에게 제물을 강제로 팔아 이익을 남기는 일이었다고 보인다. 그것은 종교를 빙자한 장사이며 강도짓과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고 가증한 일이었다.

[18-19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매양 저물매 저희가[그는] 성밖으로 나가더라[나가시더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고 그 의로운 자를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무지하고 악하였다. 그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이 대중들에게 받을 존경과 명예의 상실을 염려했던 것 같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과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의 존경과 명예 같은 세상 것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20-23절]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신적 능력이 있으셨다. 그런데 주께서는 더 놀라운 교훈을 하셨다. 그는 우리의 기도 생활에 대해 교훈하기를 우리에게 어떤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 외의 것들은 그것에 비하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헛된 세상적 욕심으로 무엇을 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다. 성경은 기도의 응답을 약속한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요한복음 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기도는 응답을 받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25-26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전통본문).

‘혐의’는 ‘마음 상하는 일이나 책망거리’를 가리킨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치 않는 죄는 기도의 큰 장애물이다. 남의 죄를 용서해야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함을 얻으며 기도의 문도 열린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고(마 6:12), 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4-15).

[27-28절]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당시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요 구약교회의 직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부패되어 있었다. 가장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그들이 그렇지 못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질문했다. 예수께서 사람의 권위로 활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권위로 활동하는 것인지 질문한 것이다. 사람의 권위는 제한적이고 오류가 있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절대적, 무제한적이며 오류가 없으시다. 그들의 질문이 진실을 알기 위한 질문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이심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이기 때문이다(요 17:3).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진실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예수님의 말의 흠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29-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하늘로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말하고, ‘사람에게로서’라는 말은 사람이 스스로 가지는 권위를 말한다. 사람이 스스로 가지는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에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고 세우시는 종들에게는 그가 주시는 권위, 특히 말씀의 권위가 있었다. 세례 요한이 그러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알았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인정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세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였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도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31-33절]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종임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 앞에 그것을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를 참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무리의 비난을 피하는 대답을 했다. 인간적으로는 지혜로운 대답인지 모르나, 진리의 세계에서는 비양심적이고 비겁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의 원천은 분명하였다.

우리는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의 응답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주 예수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8).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의 소원을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도 용서해주시며 응답해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셨다. 그는 요한복음에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고(요 7:16-17), 또 자기의 행한 일들을 통하여 자기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1).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신적 구주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따르며 사랑하며 증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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