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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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전에 하시던 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가르치시는 사역이었다. 때때로 사람들은 궁금한 것들에 대해 자유로이 질문하였던 것 같다. 본문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비난거리를 찾기 위해 질문하였다. 

[3-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하나님께서]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모세는 사람이 이혼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을 허용했다. 아내를 구박하고 학대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여자에게는 차라리 이혼이 낫다. 결혼해서 구타당하고 마음과 육체의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이혼은 결혼 제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반대된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버리든지, 아내가 남편을 버리든지, 버리는 행위는 옳지 않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부부의 사랑은 필수적 의무이다.

[10-12절]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부부가 아닌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본처에게’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 ‘그에게’라는 말인데, 그것은 본처보다 재혼한 상대를 가리킬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잘못된 이혼에 근거한 재혼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13-14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그 데려온 자들을]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것임이니라].

본문은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셨음을 증거하면서 우리에게 겸손함에 대해 교훈한다. 우리는 주님의 모범대로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영접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의 마음가짐이 어린아이같이 순진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15-16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같이 영접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우리 어른들은 성경말씀을 복잡하게 생각하여 의심하지만, 어린아이는 성경에 증거된 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순진하게 믿고 따른다.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천국 복음을 어린아이들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받고 믿어야 할 것이다.

[17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달려온 것을 보면 그는 열심이 있었고, 꿇어앉은 것을 보면 그는 겸손하였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인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영생의 방법에 대하여 물은 것을 보면, 그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달리 종교적인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실상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18-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선하지 않으셔서가 아니고 사람들 중에는 선한 자가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하시려 함이었다. 세상에는 의인이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다(롬 3:10, 23).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며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므로 선하시고 죄가 없으시다(히 4:15; 요일 3:5).

[20-21절]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십자가를 지고](전통본문)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는 경건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 같다. 그는 상당히 착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의 문제점이 재산의 많음에 있었음을 보셨다. 그는 영생을 사모하지만, 그의 재물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참으로 영생을 원한다면 그는 재물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영생은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재물은 결코 영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깜짝 놀라서, 혹은 어두운 기색을 띠고](BDAG) 근심하며 가니라.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영생을 원했지만, 그것을 위해서 그의 많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 대신에 재물을 택하였다.

[23-27절]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이](전통본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들은 흔히 가난보다 재물의 많음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난보다 부요가 복인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재물이 많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것은 아마, 부자가 그가 지금 누리는 물질의 유익들, 즉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등을, 그가 현재 실감하지 못하는 천국의 영원한 복을 위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돈을 사랑하고 부자 되기를 좋아하는 이 세상에 구원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무지한 마음을 깨우치셔서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의 구원을 얻게 하신다.

[28-31절]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아비나 어미나)(전통본문)[아내나](전통본문)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어부였던 그들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그를 따랐다(마 4:20, 22).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 때문에 가족이나 재산을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사람으로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능력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은혜로 영생을 주실 자들을 택하셨고 그들의 무지한 마음을 깨우치셔서 세상의 것들과 세상 사랑의 헛됨을 알게 하시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신다.

[32-34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人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決案)[정죄]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조롱]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주 부르셨다. 이것은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신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이 자신을 낮추심이었다. 그것이 주님의 겸손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 나라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 곧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들과 성경을 연구하는 서기관들, 곧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아를 죽이기로 정죄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것은 심히 모순된 일이었다. 주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35-37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영광의 보좌 좌우에 앉기를 탐내었다. 그것은 순전히 세상적 욕심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했어야 했다.

[38-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알 호이스 헤토이마스타이 )[예비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나의 마시는 잔,’ ‘나의 받는 세례’는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킨다. 그런 고난을 그들이 과연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의 고난에 참여케 될 것을 암시하셨다.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말씀 나눔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겼다. 그들이 분히 여겼다는 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음을 보인다. 그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속에도 비슷한 세속적 욕심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교회 안에서 높은 자리를 구하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42-44절]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린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섬김의 정신이, 이론적으로는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없다. 세상 나라는 힘과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그것이 죄악된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이 세상의 것과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섬김의 원리이다. 이 세상은 보통 지배의 원리로 운영되지만, 교회는 오직 섬김의 원리로 운영되어야 한다.

[45절] [이는] 인자(人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본절은 앞에서  주께서 하신 교훈의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준다. 우리가 서로 섬기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이유와 근거는 주님 자신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본을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속죄제물이 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여기에 섬김의 모범이 있고 교훈이 있다. 교회의 직분도 섬김의 직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은 존귀하고 우리가 그 직분과 직분자를 존중해야 하지만, 그 명예는 단지 그의 섬김과 충성과 그의 선한 열매에 달려 있다.

[46-48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소경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구절하다가](전통본문)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소경 바디매오는 구걸하며 살았던 불쌍한 거지이었다. 그는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렀다.  그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것이었다. 그 소경은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자기의 불행한 처지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갈망하였다. 그는 겸손히 예수께 소리질렀다.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했으나 그는 더욱 소리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지 않았고 무례한 자로만 여겼으나, 그는 낙심치 않고 더욱 소리지른 것이다. 그의 믿음은 간절히 부르짖는 믿음, 사람들의 방해에도 낙심치 않는 믿음이었다.

[49-50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지나쳐 버리시는 듯하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도 처음엔 응답지 않으시는 듯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낙망치 않고 믿음으로 부르짖을 때 그는 머물러 서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간절히 그리고 낙망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소경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 겉옷은 거지에게 중요한 소유물이었다. 그것은 그의 몸을 가리고 밤에 추위로부터 지켜주는 필수품이었으나 그는 그의 겉옷도 팽개쳐 버리고 주께로 나아갔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를 이만큼 열망했다. 그는 예수께로 가면 그의 소경이 고침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51-52절]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그 소경은 보기를 원하였다. 그 소경에게는 돈 몇 푼보다 시력의 회복이 필요하였다. 영적 소경인 모든 죄인들이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비참함과 구주 예수님과 내세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은 물질적인 소득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고 값진 일이다.

예수께서는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소경의 믿음을 귀히 여기셨다. 그 소경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나? 그의 믿음은 지식 있는 믿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 메시아이심을 알았고 그의 신적 능력과 자비를 믿었다. 그의 믿음은 간절한 기도로 표현된 믿음이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의 믿음은 낙심치 않는 믿음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꾸중 속에서도 낙심치 않았다.

주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었고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은 시력의 회복만의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영적구원도 가리켰다고 본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소경은 그의 시력의 회복을 얻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원리는 병고침들에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받았다.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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