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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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에게 돌을 던지며](전통본문)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모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즙 짜는 구유 자리’는 포도즙을 짜는 큰 통을 둘 자리를 가리킨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를, 농부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비유했다. 때가 이르자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었다. ‘포도원 소출’은 성도들의 선행의 열매를, 주인이 보낸 종은 선지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선한 행위와 삶을 요구하셨고 보기를 원하셨다.

[6절]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신 그의 사랑하는 아들임을 증거하셨다. 그는 선지자들과 다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1:1-2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하였다. 

[7-9절]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그 농부들은 참으로 악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었다. 이 비유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와서 그 농부들을 다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이 말씀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를 죽인 죄에 대한 큰 대가를 받을 것이다. 또 구약교회는 이제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곧 신약교회이다.

[10-11절]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건축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약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 구약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주와 교회의 기초가 되셨다(고전 3:11).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가장 극악한 행위를 인류의 구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12절]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까지는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려는 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생명을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며 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보화를 보화로 알지 못하는 저 무지한 죄인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하며 그가 세상을 위해 가장 복된 선물로 주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어야 할 그들이 도리어 그를 잡아죽이려 하니 참으로 불쌍한 자들일 뿐인 것이다.

[13-16절]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흠을 잡으려고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 중에서 사람들을 보내었다. 예수님의 교훈은 악한 위선자들에게 눈의 가시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그를 잡아죽이려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으로는 경건함을 추구했고 정치이념에 있어서는 반(反)로마적이었으나 헤롯당원들은 로마 황제가 세운 헤롯 왕을 지지하며 친(親)로마적이었다고 보인다.

[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로마 돈을 사용하고 있듯이 로마 나라에 대한 세금의 의무도 합당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세속국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세속국가의 일들에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고 위해 기도해야 하고, 국가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그 법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정한 세금도 정직하게 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국가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사자’ 혹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불렀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규정된 세금도 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롬 13:1, 4, 6, 7). 사도 베드로도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교훈했다(벧전 3:13). 

[1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부활’은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부활을 정신적 개념 정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에서 부활은 죽은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이었다고 본다. 유대인 공회 회원들의 한 부류는 바리새인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사두개인들이었다(행 23:6).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사도행전 23:8에 보면, 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당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오경을 믿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유주의자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앙자이며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이단들이다.

[19절]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주님’이라는 호칭보다 낮은 호칭이었다. 그들은 수혼(嫂婚, levirate) 제도라고 불리는 구약의 법을 인용했다(신 25:5-6). 그것은,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첫아들은 형의 자손이 되게 하는 법이었다. 이것은 모세 이전부터 있었던 법이었다. 

[20-23절]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일곱 형제의 이야기가 실제적 사실이었는지 가상적 이야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두개인들은 이 기발한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생각을 시험하려 했다. 그러나 사람의 최선의 질문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질문에 불과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2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었다. 몸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치신 진리들에 맞으며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수 있는 바이다.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죽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 침입자와 같았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씻음이 있으면 부활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믿는다면 죽은 자의 부활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한다.

[25절]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부활한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는 것은 사람이 천사들과 같이 영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은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이며 이것이 사람의 사람다운 특징이다. ‘천사와 같다’는 말은 단지 내세에서는 자녀 출산이 필요 없고 육신적 정욕도 없기 때문에 천사들과 같이 결혼의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다. 천사들은 영이기 때문에 결혼이 없다. 이와 같이,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을 것이다.

[26-27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모세의 책’이라는 말은 주께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들이 하나님의 종 모세가 쓴 책임을 증거하신 것이며, 더욱이 ‘책’이라는 단수명사를 쓰신 것은 그 다섯 권의 책들이 한 권의 책으로 간주됨을 증거하셨다고 보인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증거로서 단순히 구약의 한 구절을 인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얼른 보기에 부활과 상관없는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의 참뜻은 예수께서 설명하신 바처럼 사람의 부활을 내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결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기억 속에만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족장들의 불멸적 영혼들은 지금도 살아 있고 장차 부활하여 복된 사람들로 나타날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뜻하신 바이다.

[28-31절]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영혼]을 다하고 뜻[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것이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요](전통사본)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중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 6:5에는 목숨과 뜻이라는 두 단어가 ‘영혼’이라는 한 단어이다. ‘영혼’이라는 히브리어(네페쉬)는 ‘영혼’과 ‘목숨’이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다. ‘뜻’이라고 번역한 단어(디아노이아는 ‘생각’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 즉 목숨과 생각과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중요한 계명은 인간 관계의 계명이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남을 죽이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탐내지 않을 것이다.

[32-34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며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이나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계명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제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다 지키지 못한 죄악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제도이었다.

[35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가르치심은 그가 하신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선지자의 사역이었다. 그는 참 선지자이셨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은 ‘성전 뜰에서’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그는 산에서도(마 5:1), 바닷가에서도(마 13:1), 다락방에서도(막 14:15; 요 14-16장), 또 성전 뜰에서도 가르치셨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 구약성경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예언했다. 이것은 다윗에게 암시된 바이었고(삼하 7:12-17) 여러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바이었다(사 11:1; 렘 23:5-6; 겔 34:23). 그러나 구약성경은 또한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이심을 여러 곳에서 예언하였다. 메시아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리었고(사 9:6) 그의 근본이 태초로부터라고 예언되었다(미 5:2). 그러나 서기관들은 메시아의 한 면만 알고 메시아께서 신적 존재일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36-37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네 발등상(발판)이 되게 하기까지](전통본문)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거룩한 저자들이 쓴 책들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쓴 시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하셨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 시편 110:1은, 메시아께서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또한 ‘다윗의 주’라고 말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구약 원문에서 ‘주께서’라는 말(예호와)은 ‘여호와께서’이며, ‘내 주께’라는 말(라도니)은 본문과 같이 ‘내 주께’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장차 오실 메시아를 ‘나의 주’(아도니)라고 부른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먼 자손인 메시아를 ‘주’라고 부른 것은 그의 신성(神性) 때문이었다. 메시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또한 다윗의 주이시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자는 그의 신성(神性)을 알아야 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곧 ‘영광의 주’시며(고전 2:8; 약 2:1), ‘하나님’(요 1:1), ‘크신 하나님’(딛 2:13),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했다(고후 4:3-6).

[38-39절]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예수께서는 어떤 서기관들의 몇 가지 특징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였다. 즉 그들은 외적 치장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성도는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내면적 단장, 곧 인격의 단장, 즉 도덕성으로의 단장을 힘써야 한다(딤전 2:9-10).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이나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교만과 세상적 명예심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랍비나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교훈하셨고 또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마 23:8-12).

[40절]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이런 서기관들은 과부의 집과 재산을 삼켰다. 그들의 관심은 이 세상에 불타 없어질 물질에 있었다. 그들은 외로운 과부들을 위하는 선한 자들이 아니고 단지 그 과부들의 집과 재산을 취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기회를 보아서 그 과부들의 재산을 삼킨다. 그들은 악하고 나쁜 탐욕자들이었다.

그러나 참된 지도자는 돈에 대해 깨끗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3:3 전통사본). 불타 없어질 땅의 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땅과 함께 망할 것이지만, 영원히 있을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이다.

[41-42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는 성전의 연보궤 가까이에 계실 때 한 과부의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구약성경에서 교훈된 헌금은 십일조와 감사예물이다(레 27:30-33; 말 3:8-10).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하는 이유는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주인이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시 24:1). 

여러 부자들은 많이 넣었으나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한 렙돈은 약 128분의 1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작은 가치의 돈이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 약 10만원으로 보면, 한 렙돈은 800원 정도이고,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는 1,600원 정도이다. 가난한 과부는 지극히 작은 돈을 헌금하였다.

[43-44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예수께서는 그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보다 많이 헌금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관심은 단지 헌금 액수의 크기에 있지 않으시다. 부자의 많은 헌금이 선하고 귀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헌금 액수보다 헌금자의 마음에 관심을 두신다. 주께서는 헌금자의 헌금 액수와 그의 경제 형편을 비교하여 평가하셨다. 그것은 헌금자의 마음에 대한 평가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어려운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다. 그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의 표시이었다.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이며(고후 8:1, 4, 7) 진실한 믿음과 사랑의 표시이다.

주께서는 한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귀히 보셨다. 우리는 단지 많은 헌금을 크게 여기는 잘못된 사고방식과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헌금을 단지 금액으로만 평가하지 말고 헌금하는 자의 환경여건과 그 중심과 정성을 보아야 한다. 사람의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며 증거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세상의 주인으로 참으로 인정한다면,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참으로 믿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과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의 가진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는 우리 모두에게 교훈과 도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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