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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의 생애

아담의 둘째 아들이다. 성경은 아벨에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다만 가인에 의해 죽었고, 하나님께서 그이 제물을 열납하셨다고 소개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소개한다.( 11:4)

아벨은 아담과 하아와 동침(아다)하여 낳은 두 번째 아들이다. 아담은 가인을 낳을 때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아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4:1-2)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得男)하였다 하니라. [2절]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아담은 아벨에 대한 기대를 거의 하지 않은 것 같다. 아벨이란 뜻이 바람, 생기의 뜻도 있지만 부정적인 의미에서 허무이기도 하다. 아벨이 허무의 뜻인 헤벨에서 오지 않았는가 추측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아벨은 아담과 하와에게 소외된 존재, 버려진 존재일 수 있다. 마치 다윗처럼. 필자는 이러한 해석이 옳다고 생각한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양를 키웠다. 성경 최초로 등장하는 목자가 아벨이다. 가인의 농사를 지었다고 표현한 히브리 원어는 오베드 아다마 땅을 섬기는 자이다. 아마다는 아담의 기원이 되는 단어로 땅이란 뜻이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땅(아다마)는 저주를 받았다. 그런 저주 받은 땅을 섬기는 자가 가인이다. 그렇다고 농사짓는 것이 악하거나 죄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인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다.

[3-4a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세월이 지난 후에’( 4:3)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린다. [4b-5a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열납 되지 않은 것에 분노한다. 이야기는 갑자기 가인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가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아벨을 죽인다.( 4:8) 아벨의 생애는 참으로 허무하다. 아마도 아벨이란 이름은 생기보다는 허무에 더 어울린다.

 아벨이 드린 믿음의 제사

이제 아벨이 드린 제사를 살펴보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창세기 기자는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의 차이를 확연하게 구별한다.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이고, 아벨은  새끼이고, ‘기름이다. 기름은 고 가치를 의미한다. 아벨은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여기서 제물은 히브리어 민하이다. 구약에서 211번 사용된 중요한 단어이다.

가인이 드린 제사는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는다.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았을까. 일단 히브리서 11:4 말씀으로 돌아가보자.

히브리서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다. 예전에는 아벨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해석했지만 최근에는 삶에 초점을 맞춘다. 필자가 보기에 오해 소지가 많다. 삶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와 삶은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대해 좀더 깊이 들어가 보자. 믿음이란 어떤 상상이나 소망이 아니다. 사실이나 하나님의 선포하신 말씀이나 약속에 대한 신뢰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근거가 되는 창세기 15:6을 살펴보자.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신 후에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이다. 믿음이라 막연한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약속 없이 아브라함의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벨의 믿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드리는 제사나 헌신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아벨이 드린 제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에 근거한 것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열납 하신 것이다. 필자는 아벨이 드린 제사는 이미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다고 확신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드린 제사만이, 삶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함은 곧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했다는 뜻이기도 한다.

아벨이 드린 제물에 주의해보자. 적지 않는 이들이 가인이 드린 제물은 상관이 없고 삶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창세기를 모세의 관점, 출애굽의 관점이 아닌 연대기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계시 또는 계명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세의 율법은 이미 거듭 말씀하신 계명을 다시, 또는 정리한 것이다.

출애굽기 16장에서 광야에 내린 만나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언급하시고, 율법과 계명이라고 말씀하신다. 갑자기 안식일은 왜 등장하는 것일까? 안식일은 창세기 1장에서 여섯째 날 모든 창조를 마치고 일곱째 날 쉬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단지 만나만으로 내 계명과 율법을 언급하는 옳지 않다. 많은 학자들은 출애굽기 20장 이후 등장하는 십계명과 율법은 이미 주어진 계시를 정리한 것으로 본다.

출 16: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출 16: 28-29]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러한 맥락에서 아벨의 제사를 본다면 분명히 가인의 제사와는 너무나 다르다. 먼저 제사법상 곡물 제사는 단독으로 드릴 수 없다. 그것을 명시한 구절은 없지만 오경 안에 단 한 번도 곡물 제사를 단독으로 드린 적이 없다. 물론 이 부분은 학자들 간의 논쟁이 적지 않다. 이러한 논쟁 역시 가인의 제사가 제물과 상관없다는 논쟁과 다르지 않다. 결국 필자의 견해로는 피 없이 드리는 제사는 바른 제사가 아니다. 

또한 창세기 3:21에 언급된 가죽 옷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벨의 제사는 출애굽 이후 등장하는 구약의 제사법에 맞게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데 곡물만으로 드린단 말인가? 그런 제사는 성경 어느 곳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반적인 제사가 아닌 천사에게 드린 제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사기 13장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에게 나타났을 때 마노아는 제물을 가지고 드린다. 이것은 정식적인 제사가 아니다.

사사기 13:16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사사기 13:19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우리가 만약 히브리서 11:4의 관점으로 아벨의 제사를 해석한다면(해야 마땅하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바른 제사가 아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합당한 제사를 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요구한 대로 드리지 않았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자신이 드리는 제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자아도취의 제사이다. 한 마디로 거짓된 제사이다.

아벨은 어떻게 온전한 믿음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을까? 아벨은 가인의 동생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양의  새끼를 드렸다. 이곳에 등장하는 양은 여성형으로 암컷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부의 학자들은 암컷이 속죄의 효능이 없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레위기에서 암컷도 엄연히 하나님께 열납 되는 제물이었다.

레위기 3: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레위기 3:6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레위기 4:32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 제물로 가져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레위기 5:6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이제 정리해보자. 결국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아벨은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다.

 

아벨의 피

아벨을 언급할 때 중요한 구절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아벨의 피. 마태복음 23:35, 누가복음 11:51, 히브리서 12:24에서 언급된다.

마태복음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누가복음 11: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히브리서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세 곳에서 언급되는 모두 순교자의 피를 의미한다. 복음서의 언급( 23:35)은 죄없는 의인의 억울한 피흘림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12:24에서의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아벨의 피를 비교한다. 히브리서는 비록 아벨의 죄 없이 흘린 의로운 피라 할지라도 예수와 피교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의 피는 살리는 피다. 즉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 용서하는 살리는 피다. 그러나 아벨의 피는 의로운 피지만 아무도 살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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