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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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환상들과 계시들에 대해 말한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사도 바울이 14년 전에 환상 중에 올라간 셋째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고 천사들이 거하는 가장 높은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면 첫째 하늘은 새들이 나는 창공을, 둘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을 가리킬 것이다.

[3-4절]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사람이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그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 표현한다. 그 곳은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예수께서 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나사로가 죽은 후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눅 16:22)이나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눅 23:43)은 다 이 곳을 가리킨다. 또 히브리서 12:22가 말한 ‘하늘의 예루살렘’도 바로 이 곳이다. 셋째 하늘, 아브라함의 품, 낙원 등은 다 천국을 가리킨다.

[5-6절]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환상과 계시를, 자기 몸 안에 있었든지 혹은 자기 몸 밖에 있었던 한 사람의 경험이라고 말한 것(2-3절)은 자신의 사도직의 변증을 위해 부득이 하는 자랑이었기 때문이다. 이 간증은 거짓말이거나 과장된 말이 아니고 ‘참말’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보거나 자신의 간증을 듣는 자들이 무엇을 지나치게 생각지 않도록 그 정도만 말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놀랍고 중요한 계시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주신 계시들이 너무 중대하였기 때문에 그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 교만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교만은 마귀가 마귀가 된 죄라고 보인다. 디모데전서 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그러므로 목사들도 성도들도 교만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교만의 경향성을 꺾고 하나님의 은혜로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8-9절]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가 제거하실 수 있다. 성도가 병들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약이나 의술을 의지하는 것은 분명히 불신앙이다(대하 16:12). 의술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병들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며 그의 긍휼과 치료를 간구해야 하며(약 5:14-16) 그 후에 의사의 치료도 감사히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주시기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 번 간구했으나 거절되었다. 거절하심도 일종의 기도 응답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자주 다르다. 우리의 최선의 소원이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최선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낫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섭리하심에 우리 자신을 항상 의탁하여야 한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이었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의 일도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사역에 충만히 나타남을 깨달았다. 즉, 그가 약할 때가 곧 그가 강할 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약함들, 곧 많은 고난과 수고와 육체의 가시까지 간증하고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의 일을 힘있게 이루신다.

[11-12절]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이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아니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일을 말한 것이 어리석은 자랑임을 말한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어떤 이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에 동요되어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고 도전했기 때문에 그가 부득이 한 자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신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12절] [참으로]()(KJV)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참음으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참으로 사도의 표들은 모든 참음 가운데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능력들에 의해 행해졌도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표가 특별한 환상들을 본 것뿐 아니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임을 말한다. 사도들은 주 예수께서 친히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신 자들이며 특히 그들이 기적을 행한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신분증,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와 같았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참된 선지자들이 가졌던 표와 같았다.

[13-14절]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물질적 폐를 끼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의 재물을 구하는 자가 아니고 그들의 영혼들을 구원하고 바로 세우기를 원하는 자이었다. 천하보다 귀하고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귀한 것은 사람의 영혼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마 16:26). 또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재물을 저축하듯이,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드렸고 그의 재물도 사용했다. 물질적 이익을 초월한 교훈은 진리의 교훈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이 세상과 세상의 것들밖에 모른다. 물질적 이익은 그들에게 가장 큰 가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그것들을 초월한다. 교인들에게 물질적 폐를 끼치지 않는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참된 종이다.

[15절]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은 컸고 그는 그들을 위해 재물을 허비하고 자기 자신까지 허비하려고 한다. 주 예수님과 그의 종들은 바로 이런 길을 가셨다. 우리는 세상에서 현세적, 물질적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대가만을 바라며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셨고 도리어 사람들을 섬기시며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16-17절]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깨끗하게 사역했지만, 비난하는 자들은 그가 간교한 속임수로 교인들을 취하였다고 말했다. 그 비난은 그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허물어뜨리려는 악한 말이었다.  거짓 일꾼은 썩어지고 허무한 이 세상의 것들과 물질적 이익만을 구한다. 그러나 참 일꾼은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오는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지 않고 장차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주실 존귀와 영광을 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교회를 위해 이 세상의 것들을 소비하고 자신까지 희생하면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쓸 수 있다.

[18-19절]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利)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정신](KJV, NASB, NIV)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이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바울과 디도는 동일한 정신을 가졌고 동일한 보조로 행하였다. 그 정신과 그 걸음은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것이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교회와 교인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이 세상을 사랑치 않고 장차 올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목사와 성도들의 정신과 걸음이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가 이런 정신과 보조로 행할 때 하나님의 일은 잘될 것이다.

[20-21절]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 바울의 주관심은 그들의 회개이었다. 그는 그들이 회개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기를 원하며, 자신도 그들에게 책망의 얼굴로가 아니고 사랑과 기쁨의 얼굴로 대하게 되기를 원했다. 또 그는 그들이 회개하여 다툼이나 시기나 분냄이나 당 짓는 것이나 중상함이나 수군수군함이나 거만함이나 어지러운 일들이 없기를 바랬고, 또 그가 다시 그 곳에 갈 때 그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기를 원했고, 또 이전에 범죄했던 자들이 그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떠나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는 것일 뿐 아니라, 이제는 서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음란하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구원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그런 참된 믿음과 변화된 삶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 성경에 어긋나는 모든 것, 모든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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