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728x90

[1-2절]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이는]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이는]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이란 그의 자랑함을 가리킨다. 앞장에서 그는 주께서 주신 사도직과 그 직분을 가지고 고린도에 가서 한 그의 사역에 대해 자랑스럽게 증거했다(고후 10:13-18).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이었고 결코 분량 밖의 자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울의 사도직을 비난하고 그의 사도적 권위를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부득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한 자랑이었다.

[3절] 뱀이 그 간계로 이와(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하플로테스)[단순함, 신실함][과 깨끗함](전통사본에는 없음)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성도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변질과 부패이다. 사탄은, 옛날 에덴 동산에서 그 간계로 이와[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오늘날도 성도들을 미혹케 하려 한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지식을 버리고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그를 향한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불신앙에 떨어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대로 끝까지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

[4절] [이는]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용납함이니라].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교사들이 전파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다른 예수’는 신약성경에 증거되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이다. ‘다른 영’은 하나님의 영, 성령, 곧 진리의 영이 아닌 영이다. 그 영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그것은 거짓과 불결과 혼돈의 영이다. 그 영에게서 다른 사상이 나온다. 우리는 아무 영, 아무 사상이나 받지 않아야 한다. 성도들은 영의 출처와 소속을 분별해야 한다(요일 4:1).

‘다른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복음, 그들이 선포하고 해설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음 외의 복음을 가리킨다. 실상,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는 다른 복음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천주교회의 교훈도 다른 복음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베푸는 삶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주의 신학도 다른 복음이다. 우리는 사도적, 성경적 신앙을 지켜야 한다. 

[5-6절] [이는]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생각함이니라. 이는]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아니함이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거짓 교사들은 원사도들을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보다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지식이 말보다 중요하다.

[7-8절]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料)[후원, 후원금]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한 것은 그들을 존중하여 자신을 낮춘 것이요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아무 대가 없이 전한 것이요 그들을 섬기기 위해 다른 여러 교회의 후원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다른 교회들에게서 후원금을 받은 것을 탈취한 것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그것은 탈취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다른 교회들의 도움을 받아 그 교회를 세우고 돌아본 것이니 그것을 탈취라고 표현한 것뿐이다. 사도 바울의 이런 행위가 죄(罪)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이요 사랑이었다.

[9절]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머문 동안 물질적으로 유여했던 것이 아니고 부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았다. 그것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 즉 아마 빌립보 교인들이 그의 부족을 보충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일에 고린도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심했다. 

[10-12절]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이는 그 자랑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되려고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버리려 함이라](NASB, NIV).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품고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다. 그가 고린도 교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 것은 결코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도 별 수 없다. 결국 그도 속으로는 물질을 구하는 자일 뿐이다”라는 비난을 하려고 하였다. 이 악한 자들은 바울을 비난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기회를 끊어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순수한 믿음과 참된 사랑의 동기로 전도하고 교회들을 돌아보는 일을 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13-15절] [이는]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假裝)하는 자들이니라[자들임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假裝)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假裝)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초대교회 때부터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거짓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의 사도이지만 실상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이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저런 거짓 사도들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탄이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僞裝)한 것을 생각한다면, 사탄의 종들이 의의 일꾼으로 위장(僞裝)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저 악한 종들의 결말은 그 행위대로 될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마귀의 종은 마귀 일을 하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 어떤 이가 하나님의 종인가 마귀의 종인가는 그에게 의와 사랑과 진실의 행위가 있는지 여부를 보아서 판단할 수 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악과 거짓을 행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악한 종들을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16-20절]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사도 바울은 육신적으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자기도 육신적으로 대하려고 한다. 잠언 26:5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고 말했다. 고린도 교인들은 저 어리석은 거짓 사도들을 기쁘게 용납했다. 거짓 사도들은 교인들을 종으로 삼아 자기의 왕국을 건립하려는 자들이었고, 교인들을 잡아먹듯이 그들의 재산과 돈을 삼키는 자들이었으며, 교인들을 사로잡아 속이고 이용하고, 또 자신들을 높이고 교만하며, 심지어 교인들을 윽박지르고 구타하며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이었다. 그래도 고린도 교인들은 그 거짓 사도들, 그 거짓 교사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생각하여 참고 용납하고 있었다.

[21-23a절]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부끄럽게도 나는 우리가 연약했음을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비난에 대해 대답하기를 원한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도 바울은 그 말에 대답하여 자신도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또 거짓 사도들은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자처했다. 거기에 답변하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어떻게 많이 수고하고 고생했는지 증거한다. 그가 받은 많은 고난과 수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의 이익만을 구하지만, 참된 일꾼은 고난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위한다.

[23b-27절]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몽둥이]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一晝夜)[하룻밤과 하루 낮, 즉 만 하루]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 바울은 수고를 넘치게 하였고 고난을 많이 당했다. 그는 옥에도 여러 번 갇히었다. 그는 매도 수없이 맞았다. 그는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 그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 신명기 25:3은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고 말했다. 또 바울은 몽둥이로 매를 맞은 것이 세 번이었다. 또 그는 한 번 돌로 맞았다. 그것은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사도행전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설득]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또 그는 전도여행 중 세 번이나 배가 파선하는 일이 있었고 한 번은 만 하루를 꼬빡 깊음에서 지냈다. 그는 전도여행에서 여러 번 강을 건너는 위험, 강도들의 위험, 유대인들의 핍박의 위험, 이방인들의 핍박의 위험, 또 도시 안에서의 위험, 광야에서의 위험, 바다에서의 위험을 당했고, 게다가 거짓 형제들이 있어서 그를 악하게 비난하고 해치려는 위험도 있었다. 또 그는 수고하며 애쓰며 피곤하도록 고생했다. 또 그는 여러 번 자지 못했다. 그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먹지 못하고 굶었다. 또 그는 따뜻한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여 추위에 떨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전도 사역의 여정에서 많은 고난과 수고를 겪었다.

[28-33절]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위에서 말한 고난과 수고뿐 아니라, 사도 바울의 심령에는 날마다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가 있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사는 것을 원하는 염려이다. 주의 종들은 마치 자신들이 대신 심판대 앞에 설 것처럼 교인들을 염려하며 가르치며(히 13:17)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누가 연약하면 그의 마음은 약해졌고 누가 범죄하면 그의 마음은 애탔다. 부득이 자랑한다면 바울은 이런 여러 가지 고난들과 염려들을 자랑할 것이다. 바울의 간증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본받은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셨고 수제자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하였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주먹으로 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마 26:67). 로마 군병들도 그를 조롱하며 그에게 침을 뱉었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쳤고(마 27:29-30) 그에게 채찍질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았다(막 15:15). 예수께서는 사람의 배신과 연약으로 인한 심령의 큰 고통을 당하셨고 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바울뿐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고난을 받았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은 옥에 갇혔고(행 5:18) 채찍질을 당했다(행 5:40). 사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라고 표현했다(계 1:9). 또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고(행 7:58-60), 남녀 신도들도 옥에 갇혔다(행 8:3). 

우리는 고난을 각오하며 살자. 주께서는 그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셨었다(마 5:11).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고(행 14:22), 또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고난을 기억하고 본받아 고난을 각오하며 신앙생활을 하자.

고난과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클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주를 인해 욕과 핍박과 악한 비방을 받을 때 복이 있으며 하늘에서 우리의 상이 크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