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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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사랑을 따라 구하라[사랑을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본문은 사랑이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사랑의 덕을 구하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신령한 것, 곧 성령의 은사들을 구하라는 뜻이다. 

[2절] [이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사도시대의 방언은 크게 두가지로 ‘사람의 언어, 타국말’과 ‘천사의 말, 영의 언어’이라는 두 가지 언어 나타난다. ‘사람의 방언’이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외국어 방언의 은사로서, 내가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성령의 능력으로 갑자기 말하는 것이다. ‘천사의 말’은 본문의 방언으로, 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영적 언어’이다. 이 영의 소리를 ‘천사의 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전자는 인설방언(人說方言), 후자를 신설방언(神說方言)이라고 한다. 

[3-4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덕을 세운다’는 말은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다른 교우들에게 권면이나 위로를 주는 것을 말한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방언들]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이는](전통사본)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못함이니라].

사도는 방언하는 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통역하지 않으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므로 그들이 방언보다 예언하기를 원하였다.

[6-9절]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성도는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한다. 아무리 방언을 잘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10-12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필요하고 중요하다.

[13-14절]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누스)[생각, 이해력]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영접하면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나의 영 안에 오신다. 그리하여 신자의 영은 ‘거듭난’ 영이 되는 것이다(요 3:4~6). 구원 받은 신자는 누구나 자기 영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전 3:16). 따라서 신자들이 영으로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성령과 사람의 영, 두 영이 듀엣(Duet)을 이루어 함께 기도하게 된다.

[15-17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찬미]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영접하면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나의 영 안에 오신다. 그리하여 신자의 영은 ‘거듭난’ 영이 되는 것이다(요 3:4~6). 구원 받은 신자는 누구나 자기 영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전 3:16). 따라서 신자들이 영으로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성령과 사람의 영, 두 영이 듀엣(Duet)을 이루어 함께 기도하게 된다. 우리는 방언으로 기도하며, 또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18-19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생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그러나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기 위하여 생각을 가지고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교회에서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말이, 깨달은 말씀의 뜻을 가르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20절] 형제들아, 지혜(프렌)[생각, 깨달음]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생각]에 장성한[온전한] 사람이 되라.

사람 속에는 악의 경향성이 있으므로 악은 모를수록 좋고 경험해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생각과 깨달음에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이루며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한다. 잠언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 사람 됨)도 그러한즉.”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인격이지만, 생각이 온전하면 온전한 인격이다. 바른 생각, 깊은 생각, 원만한 생각, 온전한 생각은 성숙한 인격의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

[21-22절]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사도 바울은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이며, 예언은 믿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믿는 자는 방언을 구할 것이 아니고 예언을 구해야 하며 오늘날 성경 교훈을 사모해야 한다.

[23-25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들의 죄를 깨우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하며 그를 믿어 구원받게 한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28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많아도]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교회에서 방언을 말할 때는 두세 사람이 차례대로 하되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다른 성도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화평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29-31절]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33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방언과 예언은 무질서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되었다. 교회의 집회는 질서 있는 집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과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죄는 사람의 인격을 무질서와 혼란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주의 질서를 찾고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된다.

[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너희의 아내들](전통사본)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당시 고린도 교회에 무질서하게 예언과 방언을 하는 여자들로 인해 혼란이 있었는데 바울은 이러한 문제 있는 사람들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여자를 절제시키고 있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여자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기도하고 예언하는 여자들의 머리 모양을 바로 하도록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1:5, 11, 12). 이로 보건대 바울은 여자든 남자든 간에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35-38절]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바울이 예배 때 여자가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참조 고전 11:5). 그럼에도 여기서 매우 강한 어조로 여자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한 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문맥상 “교회의 화평과 질서 안에서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신령한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가르침의 결론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바울의 진의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스스로 자신을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생각하는 여인들이 나타나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인 질서와 화평의 권위 안에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선지자나 신령한 자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가르침이 은사를 금지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39~40절). 바울의 결론은 은사를 질서대로 품위 있게 사용해야 하며, 예언을 사모하고, 방언을 금하지 않되 적당하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39-40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교회의 공적 예배의 순서들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33절). 그러므로 사도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교훈하였다(40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게가 아니고 경건하고 차분하고 질서 있게 드려져야 한다. 찬송과 기도, 특히 설교가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에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절, “형제들아, 지혜[생각, 깨달음]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악은 모를수록 좋으나 생각은 바르고 깊고 원만하고 온전할수록 좋다. 우리는 생각에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되어야 한다(골 1:28). 그것이 온전한 성화이다.

우리는 성경을 힘써 읽고 배우고 성경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며 교회를 견고히 세워 나가야 한다. 사도는 방언보다 예언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예언이 교회의 유익을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성경 읽기와 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믿고 행하며 남에게 권면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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