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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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우상숭배의 환경을 떠나 하나님 중심의 새 민족과 새 국가를 시작하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은 가나안 땅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실 천국을 예표하였다. 이 세상은 우상숭배로 인해 멸망할 장망성(將亡城)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패역한 세상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셨다(행 2:40).

[4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메타 토 아포다네인)[죽은 후에](NASB, NIV)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고,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한다(창 11:26, 32; 12:4). 

[5-7절]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셨으나 그곳을 차지할 때가 되지 않았고 단지 약속하셨을 뿐이었다. 아직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창세기 15:13-1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손들이 이방 땅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고 400년 동안 고통과 학대를 당할 것이며 그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학대하였던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그곳에서 건져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오랜 세월 후의 일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 같은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오랜 세월 후의 일들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8절]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9-10절]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는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하셨고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내셨다. 물론 요셉은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한 삶을 기뻐하신다. 성결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쓴 요셉을 기이한 방법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

[11-14절] 그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16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셔서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은 가족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었다.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든 큰 흉년에서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이었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제들을 애굽으로 초청했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거주하게 된 까닭이었다. 이 점에서 구약성경 창세기는 출애굽기에 꼭 필요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

 

[17-1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요셉을 국무총리로 등용했던 애굽 왕은 애굽의 중왕국시대(주전 2000-1780년경)의 제12왕조 중 센우스레트 3세(대략 주전 1888-1852년경)이었을 것이며, 본절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신왕국시대(주전 1546-1085년경)의 제18왕조 때를 가리킬 것이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그 새 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자 아기가 출산하면 나일강에 던지도록 명령하였다(출 1:8-22).

[20-22절]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소피아)[지혜, 학문]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그가 부모의 집에서 단지 석 달을 길리우고 나일강에 버려졌지만, 강에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의 딸은 그를 발견하고 측은히 여겨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같이 길렀다. 또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유모로 소개되었고 그를 양육하게 되었다(출 2:1-10). 모세는 40년간 애굽 사람의 지혜와 학문을 다 배웠다. 그는 당시 애굽의 가장 좋은 궁중 교육을 받았다. 그는 말과 행위에 힘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법을 배웠고 많은 신체적 훈련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몸은 튼튼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23-25절]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사람이 자기의 삶의 목적을 깨닫고 사명을 느끼는 연령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40세는 일반적으로 늦은 감이 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부족하였다. 그는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그를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해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였다. 그는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었다. 사람 편에서의 그의 여러 가지 준비는 필요했지만, 그런 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더욱이,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없었고 또 자기의 동족들은 그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다고 생각해주지도 않았다.

[26-29절]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사람들아,](NASB, NIV)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 간의 싸움을 말리며 화해시키려 했으나 그들은 그의 중심을 알아주지 않았고 도리어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만 알려졌다. 모세는 두려워 도망쳐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젊은 시절의 꿈과 자존심은 여지없이 꺾이었다. 그는 그 이후 좌절과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하였다.

그는 도망자가 되었고 미디안 광야에서 오랫동안 양치는 목자로 살아야 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며 민족을 위해 고상한 꿈을 가졌던 그가 며칠 사이에 들판에서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고 날마다 양치는 일에 전념하여야 했던 것이다.

[30-35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카이 뉜 듀로 kai; nu'n deu'ro)[이제 오라]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모세를,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낼 자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특별 훈련의 기간이었다. 그 40년 동안 모세는 그에게 혹 남아있을 교만한 마음과 자존심을 비우는 철저한 겸손 훈련을 받았음에 틀림없고 또 많은 인내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과 기도로 많이 교제하였을 것이다. 광야는 그에게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었다. 이처럼 미디안 광야 40년은 모세에게 겸손과 인내와 기도의 훈련기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절했던 그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와 구원자로 부르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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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였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한 자이었다.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사용하셨다.

 

[37절]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주] 하나님[우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부르시고 보내셨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 자이었다(신 18:15). 모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주셨다. 사무엘을 비롯하여 여러 선지자들이 보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는 사도행전 3:22-24의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증거된 대로 특별한 선지자이신 메시아를 가리켰다고 보인다.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참 선지자이시다. 그는 모세보다 크신 참 선지자이시다.

[38절]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살아있는 말씀]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과 함께 있었고 살아있는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글자나 소리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친 음성이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레미야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9-41절]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셨고 보내셨고 그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조상들은 모세를 거절했고 그에게 복종치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다. 애굽은 하나님 없는 세상이다. 애굽에서의 생활은 물질 중심, 쾌락 중심의 죄악된 생활이다. 거기에는 술취함과 방탕함이 있었고 경건함이나 거룩함이나 절제함이 없었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세상적인 삶을 좋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사하며 기뻐하였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출 32:18-1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크게 노하셨다. 그는 그들을 완전히 멸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들을 용서하시기를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들어 그들을 당장 다 멸하지는 않으셨으나, 그 날에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레위 지파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3천명이나 죽임을 당하였다(출 32:28).

[42-43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너희]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은 아모스 5:25-27의 글을 인용한다. 그가 인용한 성경구절은 히브리어 본문이 아니고 당시에 통용되었던 헬라어역 본문이라고 보인다. 단지 맨 끝에 ‘다메섹 밖에’라는 말이 ‘바벨론 밖에’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본문은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송아지 숭배와 별 숭배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히 진노하셨고 그들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바벨론 밖으로 흩으셨다.

[44-47절]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 거처](전통본문)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의 성막을 주셨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시내산에서 본 모양대로 만든 것이었다. 그 성막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을 때 가지고 들어갔고 다윗 때까지 보존되었다. 성막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있었고, 성막 제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를 섬길 수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 중심, 법궤와 성막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였다. 또 그는 성전을 건립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고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성전 건축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48-50절]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사 66:1-2)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발받침]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그의 발받침이다.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 속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집사 스데반이 유대인 공회 앞에서 한 증거 혹은 설교의 결론은 그들의 죄에 대한 책망이었다. 스데반은 그들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다는 책망을 반복하여 받았다. 출애굽기 32:9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33:3에 보면, 모세도 그들에게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했고, 출애굽기 33: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하고 마음이 완고하다는 뜻이다. 신명기 31:27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노라”고 말하였다. 

[52-53절]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프로도타이)[배반한 자들](KJV, NASB)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천사들]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했고 의로우신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한 자들을 죽였고 이제 그 후손들인 그들이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다고 말하였다. 당시의 유대인들, 유대의 지도자들, 공회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죄 없으신 그 의인을 배반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이시며 아담 이후 모든 사람 중에 유일하게 죄 없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3년 동안 많은 말씀들을 들었고 많은 기적들과 병 고침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인 예수님을 거절하고 배반하였고 정죄하여 죽게 했던 것이다.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의 증거하는 말을 들은 유대인 공회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 그들도 양심으로는 예수께서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전하는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 스데반 앞에 있던 공회원들은 회개치 않았다.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55-56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다. 성령께서는 그의 속에 충만히 거하셨고 그를 감동하셨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스데반은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신약성경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고 아홉 번 말하였으나(롬 8:34; 엡 1:20; 골 3:1;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 계 3:21), 본절에서는 그가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셨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주께서 핍박당하는 스데반을 격려하시고 지지하심을 나타낸다. 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거나 서 계신다는 말씀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된 권위와 능력과 영광을 누리심을 보인다. 주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동일한 권위와 능력과 영광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신다.

[57-60절]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공회원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쳤고 돌로 쳤다. 그들에게는 들을 귀도, 깨닫는 마음도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날에 사울이라는 한 청년은 가까이에서 그의 죽음을 보았었다. 그 사울이 후에 사도가 된 바울이었다. 사람들이 옷을 벗어 그의 발앞에 둔 것을 보면 그는 그 일에 주동적 인물들 중 하나이었던 것 같다. 바울은 후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라고 말했다(행 22:20).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최후에 대해 두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 스데반은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예수께서도 숨이 끊어지시기 전에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46). 스데반이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한 것은 그가 하나님과 천국과 내세를 확신했음을 보인다. 둘째, 스데반은 그를 돌로 치는 원수들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 실천한 것이었다(마 5:44; 눅 23:34).

본문에 ‘잔다’는 말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표현이다. 밤에 잠자는 자들이 아침에 깨듯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할 때가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그러할 것이다. 그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고전 15:51-52; 살전 4:16-17).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 본받아 실천한 것이다. 우리도 순교자 스데반의 사랑과 용서를 본받아 우리의 원수들까지 사랑하고 그들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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