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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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도 존중하지 아니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고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가 그에게 가서 이르기를, 내 대적에게 내 원수를 갚아주소서, 하되 4 그가 한동안 들어 주지 아니하였으나 나중에 속으로 이르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도 존중하지 아니하지만

5 이 과부가 나를 괴롭게 하므로 내가 그녀의 원수를 갚아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항상 와서 나를 지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관이 말하는 것을 들으라.

7 비록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자기에게 부르짖는 자들 곧 자기의 선택 받은 자들을 향하여 오랫동안 참으실지라도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지 아니 하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분께 서 속히 그들의 원수를 갚아 주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도는 어려운 일이 많은 세상에서 낙망치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다.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기억하자. 그 재판관도 보잘것없는 한 과부의 탄원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독생자의 피로 구원하신 그의 사랑하는 택하신 자녀들의 소원을 외면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응답을 확신하고 참고 낙심치 말고 열심히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9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는 자들과 불의한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일주일에 두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날도 교회에 드나드는 자들 중에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외적으로는 종교적 형식을 다 지키지만 자신의 부족에 대한 깨달음이 없어서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자요, 다른 하나는 세리처럼 자신의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고,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에 심히 부족한 큰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의 죄성과 연약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세리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물리치심을 받을 것이다.

15 그들이 그분께서 쓰다듬어 주실 것을 바라며 어린 아기들도 그분께 데려왔으나 그분의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그들을 꾸짖거늘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나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17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결코 그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8 어떤 치리자가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 이까? 하매 19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 하라, 하는 명령들을 아느니라,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 하거늘 22 이제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 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매

23 그가 큰 부자였으므로 이것을 듣고 심히 근심하니라. 24 예수님께서 그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25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그것을 들은 자들이 이르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요? 하매 27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니라, 하시니라.

28 그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하매 29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집이나 부모나 형제나 아내나 자녀를 버리고서 30 이 현 시대에서 여러배를 받지 못할 자가 없고 또 오는 세상에서 영존하는 생명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8: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 흔히 랍비들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본절에서 '낙타'와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예수께서 의도하신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다만 어떤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옆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기에 알맞은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작은 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은 문은 바늘귀 문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표현은, 약대가 이 작은 문을 억지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에서 생긴 것이라 한다. 또 하나는 '약대'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카멜로스'(* )인데 발음이 이와 비슷하게 들리는 '카밀로스'(* )란 단어는 선박용 밧줄을 의미한다. 따라서 '밧줄'을 바늘귀에 꿰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쉽다는 비유로 이해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 의도하는 바는 부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 한다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이 소유하여 즐기는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마 19:23;막 10:23).

18:26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여기서 '구원받다'는 말은 '영생을 얻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은 '그렇다면 구원을 얻기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도 '그토록 어렵다면 어느 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If it that hard, how can anyone be saved?)라고 옮겼다. 예수와 부자 관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개념상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욥 1:10), 당시 종교적 관행상으로 볼때 이 관원의 행실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한 듯이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18:27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이는 부자 관원과 나누신 대화의 결론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관원에게 예수께서 십계명 중 일부를 제시하신 것은 사실상 그 계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고백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령 율법의 한 부분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을 범하고 마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은 '다 지켰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따라서 예수는 관원이 부자이고 그의 마음이 물욕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알고 허를 찌르는 요구를 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두번째 요구 말씀도 실천을 요청하신 것이라고 보다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이 관원이 설령 예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였다고 해도 그 행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18:28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 일시적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예수의 대답(27절)을 듣고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관원이 하지 못한 그 일을 자신들은 해왔다고 하는 정역절 고백과 확인 요구의 말씀을 한다. 마 19:27에 의하면 베드로는 이 말 뒤에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란 말을 덧붙인다.
부자 관원과는 틀리다고 하는 자부심을 은근히 비춰주는 베드로의 말은 처음 그가 예수를 만나 따라 나설 때의 극적인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마 4:20).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가 헌신적인 결단을 감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이르게는 되었지만 예수의 공생애 당시만 하더라도 메시야관이나 천국관에 있어 많은 오해를 지니고 있었고 인간적 나약함이나 무지로 말미암은 시행 착오를 무수히 겪어야 했던 것이다(막 14:66-72). 본절의 경우는 은근히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과시욕과 예수의 말씀에 담긴 속 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아둔함을 드러내 보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아마 제자들은 부자 관원에게 하신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을 것이다(22절).

18:29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 마 19:29에 의하면 '내 이름을 위하여'이며 막 10:29에 의하면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이다. 따라서 예수와 그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됨을 의미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계신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다.
집이나...자녀를 버린자는 - 누가가 포기의 대상(물건, 사람)으로 삼은 것은 마가가 명시한 것과 다르다. 누가는 마가가 기록한 '전토'(田土)를 생략하고 그 대신 '아내'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그가 버려야 할 대상을 주로 인간 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Marshall).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를 좇기위해 그들의 가정과 직업까지도 포기함으로써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무엇인가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금생과 내생에서 충분히 넘치도록 다시보상을 받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한 사람이 안정된 직업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사람은 하나님게서 금생과 내생에서 그 자신과 안전된 영원한 관계를 갖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일 한 사람이 가족의 친성(親性)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의 사랑을 얻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는데 수반되는 희생 대가를 지불했다. 아울러 예수께서도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보상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미 포기한 것에 대해 미련을 두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우리가 포기한 것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불가피한 포기나 헌신은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서가 아니라 구원에의 확신에 따른 자발적 순종의 표시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것이다.

18: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 누가와 마태는 단지 '여러 배'(many times, NIV)를 받는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는 '백 배'라고 하여 최상의 보상을 강조하고 있다(마19:29;막 10:30). 또한 마가는 '핍박을 겸하여' 받게됨을 지적하고 마태는 굳이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축복을 시사하지만, 누가는 현세의 보상에 비교적 강조점을 많이 두었다. 본절을 이해함에 있어 우리는 단지 물량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서 보상의 기준을 삼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면 성도들이 물질적 축복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가면 단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만 세속적 탐욕의 노예가 되면 백만 장자가 되어도 불만과 번민에 시달릴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문제는 누림의 질에 있는 것이지 그 양에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현실
에는 핍박과 고통이 함께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물질적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는 역설적 충족감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이다(고후 6:10).

31 ¶ 그 뒤에 그분께서 열두 제자를 데려다가 그들에게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사람의 아들에 대하여 대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리라. 32 그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서 조롱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며 침 뱉음을 당하리라. 33 그들이 그를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요, 셋째 날에 그가 다시 일어나리라, 하시되

34 그들은 이것들 중 어떤것도 깨 닫지 못하였더라. 이 말씀이 그들에 게 숨겨졌으므로 그들은 그 말씀하신 것들을 알지 못하였더라.

사람은 영적으로 심히 어두워져 있어서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도 잘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1:27), 또 그는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17).

35 ¶ 그분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어떤 눈먼 사람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듣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으매 37 그들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말하니 38 그가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거늘

39 앞에 가던 자들이 그를 꾸짖어 그가 잠잠하게 하였으나 그가 더욱더 소리를 지르며,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더라. 40 예수님께서 서서 그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시니 그가 가까이 오매 그분께서 그에게 물어

41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주여, 내가 시력을 받게해 주옵소서, 하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시력을 받으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하시니

43 그가 즉시 시력을 받고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을 따르매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니라.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러자 그는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랐다. 백성들은 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의 치료는 단순하고 즉각적이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셨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다. 예수님은 인생을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신적 구주이신 것이 다시 한 번 증거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참으로 많았다. 그는 많은 확실한 증거로 증거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즉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인간을 불행에서 건져내시기에 유능하신 구주이시다. 그러나 이 치료는 믿음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의 사역이지만 단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도 영적 소경인 모든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소원을 아뢸 때 영적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자이심을 알고 시시때때로 그에게 나아가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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