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절]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무리를 대하여 나의 기쁨이 너희 무리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고 근심하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 교인들은 목사의 기쁨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4:1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의 기쁨은 바울의 기쁨이 되고 그들의 근심은 그의 근심이 된다.
[4절]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에게는 외적으로는 큰 환난과 핍박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애통과 근심이 있었다. 그의 애통과 근심은 고린도 교인들의 연약과 부족 때문에 왔고 그러므로 그는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었다. 바울의 사역은 눈물이 있는 사역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냈던 사도 바울의 눈물의 편지는 책망과 권면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근심과 슬픔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을 향한 그의 뜨겁고 넘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사랑이 아니라면 눈물의 책망의 편지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책망은 감추인 사랑보다 낫다.
[5-6절]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희 무리를]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
‘근심하게 한 자’는 범죄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그로 인해 근심했으나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케 한 것”이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고린도 교회는 범죄자를 권징하라는 그의 권면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람들이 그 권징에 반대했을지도 모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찬성했고 그 범죄자를 벌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에는 권징이 있었다. 그들은 사도의 권면을 순종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사도를 통해 주신 성령의 권면을 따랐다. 그 교회는 참된 신앙고백과 순종이 있는 교회이었다.
[7-9절]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권징은 벌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죄인의 회개를 목표로 한다. 권징치 않으면 죄 가운데 머물 형제를 권징을 통해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이제 권징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므로, 사도 바울은 그 범죄자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한 후 그를 품어주듯이, 그는 그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말한다. 오늘날도 교회는 권징이 있고 용서와 위로도 있어야 한다. 이것이 참 교회의 모습이다.
[10-11절]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교회는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해벌(解罰)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행해진다. 사탄의 궤계는 첫째, 성도를 범죄케 하는 것과, 둘째, 낙심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벌도 필요하지만 회개한 자에게 주는 용서와 위로도 필요하다. 사탄은 죄인에게 속박과 근심과 낙심을 주지만, 주 예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여 그에게 죄로부터의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주신다.
[12-13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주 안에서 열린 ‘문’은 전도의 문이다. 문은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야 된다. 전도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드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주 안에서 바울에게 열렸고 그는 거기서 복음을 전했으나,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치 못해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지식의 향기,’ 곧 그리스도의 지식을 널리 알리는 향기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약시대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듯이”(삼하 8:6, 14),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의 전도 사역에서 그들이 항상 이기게 하셨다. 그의 사역은 고난 중에서도 항상 승리적이었다. 오늘날도 진리의 사역은 항상 승리적이다. 불순종과 죄는 실패의 원인이지만, 순종과 의는 항상 승리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인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의 사역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15-16절]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이며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향기이다. 그러나 이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전도는 참으로 존귀하고 복된 직무이며 두렵고 떨리는 직무이다. 그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생명과 사망을 나누고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나누기 때문이다(요 3:18). 우리는 사람의 지혜나 힘으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을 감당할 뿐이다.
[17절]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혼잡하게 한다’는 원어(카펠루오)는 ‘장사한다, 품질을 떨어뜨린다, 부패시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라는 원어(호스 에크 데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라는 뜻인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많은 거짓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같이 또는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였다. 그는 말씀의 바른 일꾼이었고 모든 시대에 설교자의 좋은 본이 되었다. 말씀의 일꾼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변질되거나 타협하지 말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지 말고 순수하게, 순전하게 전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사도 시대의 거짓 교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시키거나 부패시키거나 변질시키지 말고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가감하지 말고 바르고 순수하게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자. 그러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성경 읽기와 연구하기와 묵상하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가감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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