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1-2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평안]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편지하였다. 고린도시에 많은 단체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교회는 그런 인간적 단체들과 다른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거룩케 하시고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신 사람들의 모임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의 아버지가 아니시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시나 동시에 우리가 범죄할 때 징계하시는 아버지이시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 곧 우리와 온 세상의 주인, 주관자, 왕, 하나님이시다.

[3-4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하나님과 아버지](원문)이시요 자비[자비들]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표현되신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20:17).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뜻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였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난 중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로하셨다. 성도에게는 환난이 있으나 위로도 있다. 그것은 사람의 위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위로, 즉 하나님의 영육의 도우심과 간섭하심의 위로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순교의 길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모든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다.

[5-7절] 그리스도의 고난[고난들]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그리스도의 고난들’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즉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에, 그의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받는 여러 종류의 고난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넘치게 경험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즉 그리스도께서 공급하시는 위로도 넘치게 경험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 가운데 고난들도 허락하시지만, 결단코 자기 백성을 미워하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니시다. 그는 그의 작정하신 때에 풍성한 위로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고난도 받고 위로도 받는 것은 신앙생활에 유익할 뿐 아니라, 특히 남을 돕는 데 유익하다.

[8-9절]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과 디모데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언급한다.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였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었다. 그것은 죽음의 문앞에까지 간 환난이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절망의 때이었다. 그는 그것을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표현하였다. 사도 바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때때로 성도들에게 이런 극심한 고난이 닥쳐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기쁨과 위로의 줄을 다 끊어버리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들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로,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신 8:2). 둘째로, 고난은,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많은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견고해진다. 셋째로, 고난은 우리의 인격을 거룩하게 한다(히 12:10-11).

[10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 일행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고난에서 건져내어 주셨다. “또 건지시리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현재형이다(뤼에타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는도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적용된다. 그는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시고 또 건지실 것이라는 뜻이다. “의지하여 바라노라”는 원어(엘피카멘)는 완료형으로 소망의 확실함을 보인다. 과거에 함께하신 하나님, 지금도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미래에도 함께하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신다.

[11절]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쉰위푸르군톤)[돕고 있도다].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원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 일행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돕고 있다는 뜻이라고 본다(KJV, NASB). 성도들은 복음사역자들을 위해 기도와 간구로 협력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복음사역자들 자신들의 기도뿐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사역을 위한 성도들의 힘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이루게 할 것이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 사역과 그 일꾼들을 위해 기도로 도와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중요한 방법이다. 복음 사역과 그 일꾼들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힘있게 이룰 것이다.

[12-14절]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거룩함’이라는 원어의 전통본문(하플로테스)은 ‘단순함’(KJV)이라는 뜻이며 원문은 ‘단순함과 하나님의 진실함으로’라는 말이다. 바울은 성도들을 대할 때 단순함과 하나님의 진실함으로 했다. 또 그는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 육체의 지혜는 이기적이며 계산적이다. 그것은 겉보기는 그럴 듯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진실한 척하나 진실이 없고, 의로운 척하나 의롭지 못하고, 사랑하는 척하나 사랑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 특히 믿음 안에서 형제된 다른 교우들을 대할 때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이지 않고 거짓되지 않고 사람의 꾀나 세상적 생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서 단순하고 솔직하며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행해야 한다.

[15-20절]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사도 바울의 본래 여행 계획은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로 가고 그 후 다시 고린도에 가서 유대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의 이 여행 계획은 쉽게 ‘예’하고 쉽게 ‘아니오’하는 경솔한 계획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신적, 인간적 계획이 아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경솔하게 예 하고 아니오 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는 불신실하신 분이 아니셨다. ‘저에게는 예만 되었다’는 말은 ‘오직 저에게는 예가 있었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예’ 하시고 끝까지, 죽기까지 그것을 지키셨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하셨다.

사도 바울은 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의 약속 곧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약속이며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다. 그것은 영육의 복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이며 아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21-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견고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의존한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나 그가 우리 대신 죽으셨음으로 우리가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심은 특히 그가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사실에서 증거되었다. 성령의 인치심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가리킨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 안에 이미 거하신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또다시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고 단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하심은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영육의 모든 기관들과 기능들을 주관하시는 것을 말한다. 성도의 구원의 보장은 삼중적(三重的)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과 그의 중보사역의 효력이며,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이다. 본문은 이 세 번째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시는 하나님의 인치심이시다.

[23-24절]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 계획의 변경을 해명하면서 자신을 ‘너희 기쁨을 돕는 자’라고 겸손히 표현하였다. 이단자들이나 사이비종파의 교주들은 그들의 잘못된 교리들을 가지고 교인들의 믿음을 주장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겸손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주관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시고 보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사든지 교사든지 권찰이든지 다른 이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 처신해야 한다. 우리는 속죄 신앙에 굳게 서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남의 믿음을 주관하려 하지 말고 그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남을 섬기는 자로 처신하며 겸손히 그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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