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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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는 총 12가지의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의 비유가 기록되었다(씨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알곡과 가라지 비유, 보물 비유, 진주 비유, 그물 비유,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 포도원 품꾼의 비유, 혼인잔치 비유, 열 처녀비유, 달란트비유). 총 12가지의 비유중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는 마가와 누가도 기록했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으로 기록하였다. 즉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하늘의 왕국에도 적용이 되고 천국(하나님의 왕국)에도 적용이 되는 비유의 말씀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의 비밀(신비)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0-12).

비유
성경
내용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13:1-9
막4:1-9
눅8:4-8
1. 길가 :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는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 간다. 마귀가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낚아 가로챈다. 마귀의 주요 관심사는 오직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창가에 햇볕이 비춰도 스스로 암막 커튼을 치면 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어둠 속에 살듯이 하나님께서 복음의 광채를 비춰주셔도 스스로 마음을 강팍하게 하면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2. 돌밭 : 싹은 내지만 뿌리가 없어 금방 시들어 버린다. 즉 말씀으로 인해 핍박이 오면 금방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 뿌리가 없다는 것은 겉으로는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3. 가시밭 : 가시가 함께 자라도록 자신을 방치했기 때문에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한다. 인생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문명의 이기(利器)에 노출된 사람일수록 증가한다.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염려도 함께 증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6:24).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영원한 생명이 아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될 때 하나님 보다 내가 크게 보이게 되고 그런 마음이 가시가 되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4. 좋은 땅 : 좋은 땅에 떨어지면 양(30, 60, 100)은 다르지만 반드시 결실하게 되어 있다. 좋은 땅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귀가 채어가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다. 즉 성화에 까지 이르는 사람이다.
겨자씨 비유
마13:31
막4:30
눅13:18-21
왕국과 교회를 하나로 일치(무천년주의)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비유가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다. 천주교와 장로교의 해석 방법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 것을 교회의 확장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문맥적으로 성경을 보면 이런 해석은 불가능하다.
겨자씨는 채소다. 채소가 엄청 큰 나무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나무에는 공중의 새 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를 악한 자, 마귀라고 말씀하셨다(마13:19, 눅8: 12). 새는 앞뒤 문맥상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성경은 나무가 자라서 하늘에까지 이르는 모습을 통치의 확장으로 표현한다(단4:19-20). 채소인 겨자씨가 비 이상적으로 커서 나무가 됐다는 것은 통치가 확장됨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모습을 표방한 체제가 나타나서 사악한 새 마귀가 거기에 와서 깃들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노략질하는 모습이다.
누룩 비유
마13:33
막4:33-34
누룩 비유는 겨자씨 비유와 함께 해석의 혼동을 주는 말씀이다. 누룩을 교회가 확장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이끄는 것으로 비유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할 때 가장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누룩은 성경에 총 23회가 나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무교절을 지킬 때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을 먹었다(출15:15). 무교절에 누룩이 집에서 발견되면 그 사람은 멸절됐다. 누룩은 발효를 일으키는 것으로 발효는 썩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마16:6-12, 고전5:6-8).
📍하늘 왕국(kingdom of heaven)을 천국으로 오역했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것을 방해한다
여자가 가루 서말에 누룩을 넣어 부풀어 올랐다. 밀가루 자체는 좋은 것이지 나쁜 것(누룩)이 들어와서 밀가루를 나쁜 것으로 부풀게 만들었다. 성경에서 교회를 말할 때는 순결한 '처녀'라고 말하고(고후11:2-3). 사악한 종교 시스템을 말할 때는 '여자'라고 말한다(계17:3, 4, 7, 18).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하늘의 왕국이 예수님의 재림의 때까지 연기된 가운데 교회가 부패하여 교회의 악한 교리가 세상에 팽창하여 예수님 오실 때는 교회가 거짓으로 가득차 있는 곳이 된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수 많은 교회 건물과 자칭 그리스도인의 수는 늘어날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대로 믿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씀이다.
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13:24-30

하나님께서 말씀의 씨를 뿌리면 마귀도 동시에 가라지를 뿌린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라고 말했다(고후11:13-15). 목사가 다 목사가 아니고 교회에 출석한다고 다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세상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일이 발생한다.

왼쪽사진이 밀(알곡)이고 오는쪽 사진이 독보리(가리지)다. 가라지는 잡초처럼 생기지 않고 생김새가 알곡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다. 그래서 눈으로는 쉽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가라지는 겉보기에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끝에 가서야 그들의 실체가 들어난다. 하늘의 왕국의 신비가 이루어지는 기간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부터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시간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서 공존하는 기간이다.
감추인 보화
비유
마13:44

"하늘의 왕국은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treasure)과 같으니라". 밭은 세상이다(마13:38). 즉 세상에 감추어진 보물로 인해 세상을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소유(보물)라고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이라는 밭에 이스라엘을 숨겨놓으시고 자신의 전 소유를 팔아 세상을 사셨다. 이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이 세상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예표이다.
좋은 진주 비유
마13:45-46
보화가 이스라엘이라면 진주는 교회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이 세상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피와 물)을 쏟으시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사셨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실함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성도는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 나의 전 재산(시간, 물질, 재능)을 들여서 하늘의 것(복음 전파)을 사는 것이 성도의 신실함이다.
그물 비유
마13:47-50
그물비유는 가라지 비유와 매우 흡사하다.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교회는 100% 보이지 않는 교회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눈으로 들여다 보이는 교회 안에는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섞여 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존하는 기간이다 .
일만 달란트비유
1달란트(3000세겔)
1세겔(4일 품삯)
1데나리온(1일 품삯)
마18:23-35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내용이다. 탕감과 용서의 어원(아-피에미)은 같다. 베드로가 "형제를 몇 번까지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고 "하늘왕국은 종들과 결산하는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말씀하시며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00일 품삯에 해당하고 일만 달란트는 노동자의 120,000,000일의 품삯에 해당한다. 일만 탈란트는 도저히 인간의 노력으로 갚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들이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백데나리온은 무엇인가? 일만 달란트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용서하지 못할 백데나리온은 존재할 수 없다.
포도원 품꾼 비유
마20:1-16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예수님을 섬길 때의 태도에 관한 말씀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이 될 때 예수님과 함께 한 열두 제자들이 이른 아침에 고용된 포도원 품꾼에 해당한다.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 온 자들은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받기로 하고 포도원에 들어왔지만(2절), 제삼시에 들어온 자들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는 말만 듣고 들어왔다(4절).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들과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제일 마지막에 포도원에 들어온 자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는 것을 보고 이른 아침에 들어온 자들은 자신들이 더 받을 줄 알았다가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주는 것을 보고 집 주인을 원망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한 시간당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원망하며 불평하는 품꾼에게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받고 일하기로 계약하고 들어왔고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었거늘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고 말하며 나중에 온 사람에게 너희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먼저 된 자들, 즉 처음으로 예수님을 따른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사람이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나를 따르다가 나중 된 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예수님을 섬길 때의 태도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섬길 때 계약서를 쓰듯이 "내가 이만큼 일했으니 이만큼을 주시겠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다. 내가 마땅이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포도원 농부 비유
마21:33-46
막12:1-12
눅20:9-19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배척을 당하고 끝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비유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사5:1-7).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해 내신 후에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제사장 국가로 삼으신 후 땅의 모든 복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 멸절하라는 가나인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 민족에게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법을 떠났다. 이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을 때리고 잡아 죽였다. 결국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들은 그들의 메시아 마져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포도원을 맡기신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포도원을 잘 관리하여 열매를 맺기는 커녕 주인의 아들까지 죽이고 말았다.
혼인잔치 비유
마22:1-14
눅14;15-24
혼인 잔치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이다. 본문 말씀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교회(성도)에 적용하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해석이 나오게 되며 사도바울이 전한 구원의 핵심 교리와 충돌을 일으킨다.
3-7절의 내용은 왕이 자신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종을 보내어 손님을 청했지만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심지어 그 종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에 왕이 노하여 자신의 군대를 보내어 종을 죽인 살인자를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른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스라엘의 멸망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9절부터의 네거리 길에 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혼인 잔치에 사람을 청하는데 대부분의 교회가 이들을 교회로 해석한다. 성경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로 손님을 초청하는 사람이지 손님이 아니다(계22:17). 그렇기 때문에 본문 말씀을 교회에 적용하면 문제가 생긴다. 개역성경이 마태복음에서 천국으로 번역한 것은 kingdom of heaven으로 하늘의 왕국을 오역한 것이다.
3-7절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하나도 돌위에 남지않고 멸망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실제적으로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8-14절 말씀은 교회시대를 뛰어 넘어서 하늘의 왕국이 이루어지기 전 칠 년 환난기의 끝부분의 사건으로 봐야 한다. 9-10절에 혼인잔치에 손님으로 가득찬 것은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다는 뜻이고, 11-14절의 말씀은 민족적으로 부르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개별적으로 심판하시는 내용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 문자적으로 수신자가 누구인가를 보고 누구에게 적용이 되는 말씀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영적으로 나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잘못된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본문을 영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복음이 전해졌을 때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 그 복음에 반응하지 않고 심지어 조롱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의롭다 칭해주신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옷을 거부하고 '자기의 의'로 옷입고 하나님 앞에 나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의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는 다 더러운 옷이기 때문이다(사64:6).
열 처녀 비유
마25:1-13
마태복음 25장은 마태복음 24장과 연결된 내용이다. 마태복음 25장을 이해하려면 25장이 나오게 된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임하실 때의 내용을 마태복음 24- 25장에서 대답하신 것이다.
25장 1절을 보면 그 때에 하늘의 왕국은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그 때는 주님께서 임하시는 때를 가리킨다. 마태복음 24-25장을 교회안에 끌어들여서 교회에 적용하면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마24:13),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칠 년 환난에 들어가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임하실 때까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교회에 적용하면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행위구원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에 교회에서 기름을 성령님이라고 해석하여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는 구원을 받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는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령님이 타서 소멸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성령님이 떨어져서 돈을 주고 사오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시몬이 베드로에게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하였을 때 베드로가 시몬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8:20)라고 말했다.
본문의 열 처녀는 처녀들이다(7, 11절).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는 처녀들이 아니라 한 처녀이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성경에서 예수님의 신부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한 몸이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열 처녀들은 결혼을 하려고 가는 신부가 아니라 신랑을 맞으러 가는 쳐녀들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말씀은 주가 임하는 때 곧 칠 년 환난에 들어가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달란트 비유
마25:14-30
므나 비유가 교회 시대에 신약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면 달란트 비유는 유대인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25장의 시작은 그 땡에 하늘의 왕국은 으로 시작한다. 마태복음 24장 대환난이 끝나는 시점에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달란트를 각각 능력에 따라 개별적으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 능력에 따라 받은 것을 능력껏 남겼기에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과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을 똑같이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영광을 받았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둔 사람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영원이 이를 가는 일이 발생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을 몰라서 망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한 달란트를 받은 자를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양과 염소 비유
마25:31-46

양 민족과 염소 민족의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들이다. 예수님께서 양 민족과 염소 민족을 심판하실 때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kingdom)를 상속받으라"고 양 민족에게 말씀하셨고 염속 민족에게는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교회에 적용해서 양 민족처럼 불쌍한 이웃에게 선한 행위를 하면 구원을 받고 염소 민족처럼 불상한 이웃을 돌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옆에 있는 이웃을 돌봄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본문 말씀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사용하는 말씀이다. 칠 년 환난기 끝에 주신 말씀을 교회에 적용하여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위의 그림을 보면 양 민족과 염소 민족 사이에 내 형제들(유대인)이 존재한다. 마태복음 25장은 마태복음 24장과 연결된 내용이다. 마태복음 25장을 이해하려면 25장이 나오게 된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주님께서 임하실 때의 내용을 마태복음 24장 4절부터 25장까지 대답하셨다. 양 민족과 염소 민족의 심판은 칠 년 환난이 끝나고 천년왕국에 들어갈 자들을 가리는 심판이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칠 년 환난을 통과하는 유대인들 중에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환난을 견딜 때 내 형제 곧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본문의 양들은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니라, 양 민족은 칠 년 환난기 때 믿음을 가지고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방인 환난기 성도들이다.
새옷과
낡은 옷의 비유
새 포도주 비유
마9:16-17
막2:21-2
눅5:36-38
예수님은 이 땅에 새 옷을 주러 오셨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기독교는 유대교의 뚫이진 구멍을 메꾸는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이후 예수님께서 세우신 신약 교회는 새 상속 언약 위에 세워진 새로운 틀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시스템 자체가 낡은 부대이다. 사람의 전통으로 세워진 유대인들의 변질된 전통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을 담을 수 없다. 낡은 부대에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을 넣으면 포도즙이 발효되면서 낡은 가죽부대를 터트리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상속언약 또한 낡은 유대교 전통 시스템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청함을 받은
사람의 비유
눅14:7-11
종교인(바리새인, 서기관 등)들의 문제는 탐욕과 위선과 교만이다. 이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으뜸가는 자리를 구한다(마23:6). 보상은 이 땅에서 사람에게 받든지 하늘에서 하나님께 받든지 기회는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자신이 행한 일을 떠벌리는 자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한다(마6:1-2).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다(눅18:14).
잃은 양의 비유
눅15:3-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잃어 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잃어 버린 양을 직접 찾아 나서지만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 만이 구원을 받는다.
양은 어리석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 양은 외관상 온순한 동물에 속하지만, 고집이 세고 우둔하고 시력이 나빠서 한 번 길을 잃으면 자력으로 집을 찾아 오지 못한다. 또 장애물을 만나 넘어지기라도 하면 절대 자력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양에게는 목자의 보호와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서서 그 양을 구출한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양이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듯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사람을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비유로 설명하셨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를 양에 비유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눅15:8-10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남녀가 결혼을 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의 증표로 10개의 드라크마를 줄에 꿰어 선물했다. 아내는 그것을 머리띠처럼 자신의 머리를 장식했다. 잃어 버린 드라크마는 단순한 동전 한 개가 아닌 결혼한 여인의 증표이다.
​양은 고집이 세고 어리석어서 주인을 잃어 버리고 동전은 부주의해서 잃어 버린다.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들어 있었다. 사람이 잃어버린 동전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찾아주시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동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듯이 사람이 잃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성령님께서 조명해 주시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셔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을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이 새겨진 존재다. 그러나 잃어버린 동전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찾아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다. 지금 우리에겐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인가? 이 세상의 신 마귀의 형상인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눅15:11-24
예수님께서 명료하게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 잃어 버린 양을 직접 찾아 오실 때 둘째 아들처럼 회개하고 돌이켜서 아버지께 돌아오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 ​사람은 누구나 비뚤어진 길로 가려는 성향이 수태되는 순간부터 있고 그 생각을 둘째 아들처럼 실행한다. 사람은 둘째 아들처럼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될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라 사람의 생명이 그의 풍부한소유물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눅12:15).
탕자는 인생과 재물과 모든 기회를 헛된 것에 사용한 사람이다. 탕자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바닥까지 떨어진 후에야 비로서 스스로 돌이켰다.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정신이 가출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출한 정신이 돌아올 때 하나님을 의식하게 된다. 탕자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을 뒤늦게 깨닫고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다. 만약에 탕자가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후회만 하고 돌이키지 않았다면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도 후회에 멈춰있고 돌이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로 태어난다.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멀어지려는 습성이 있다. 이는 아담의 본성 곧 죗성이 사람안에 내재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의 날에 기쁨을 위해, 즉 자신의 달음질과 수고가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쳐서 주께 복종시켰다 (빌2:16, 고전9:27).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폐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한다(렘17:9).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탕자의 본성이 또 나오고야 만다.
우리는 보통 도둑질, 사기, 폭행 등 눈으로 드러나는 범죄를 죄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무겁게 다루시는 죄는 외식하는 죄이다. 즉 겉으로 깨끗한척 의로운척 하는 교만한 사람들이다. 외식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종교인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습이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눅16:1-13
청지기란 주인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누리지만 그 재산이 주인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맡겨진 돈과 기회와 재능을 어떻게 지혜롭게 소비해야 하는지를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물은 돈의 속성을 뜻한다. 재물은 중립적이다. 재물이 스스로 악하거나 선하거나 하지 않지만 모든 재물이 있는 곳에 정욕이 깃들기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는 돈을 불의한 재물이라 단정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한 재물을 쌓아두려 하지 말고 그 돈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과 시간을 영원한 미래를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옳지 않은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 났을 때를 준비한 것처럼 이 땅에서의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자신이 가진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한다.
과부와
재판장 비유
눅18:1-8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한 과부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청원에 대하여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귀찮아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다. 예수님께서 이 불의한 재판관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시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고 하시며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결국 믿는 자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의 원수 마귀를 멸하시고 원수 마귀가 뿌려놓은 가라지를 불에 살라버리는 것이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일이다.
본문 말씀을 근거로 무조건 강청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도에는 항상 전제가 따른다. 기도는 하나님의 소원을 나의 소원으로 삼는 것이다. 개인적인 간구를 하더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야 한다.
1.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3.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눅18:9-14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리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연설하듯 기도한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신(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 중에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은 세리였다.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열므나 비유
눅19:11-27
신약 시대 성도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분부의 말씀이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한 므나씩 주시며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교회(신부)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셨다가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성도)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내용이다.
므나는 그 종 열을 불러서 능력과 상관없이 동일하게 한 므나씩 주셨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열 고을 권세를 주셨고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다섯 고을 권세를 주셨다. 고흘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왕국을 통치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다(계5:10). 한 므나를 받은 사람은 주인을 엄한 사람이라고 오했기 때문에 므나를 수건으로 싸 두었다. 주인은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 둔 종에게 은행에 넣었더라면 이자라도 받았을 것이라며 그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주고 심판하셨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땅속에 감추어 놓았던 사람처럼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지는 않았다.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두었던 사람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보상의 손실은 받았어도 구원을 잃지는 않는 것이다.
무화과 나무 비유
눅21:29-31
마24:32-35
막13:28-31
눅21:29-30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성경에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르킨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무화과 나무뿐 아니라 모든 나무를 보라고 말씀하신다. 즉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행해지는 것을 보면 그 날과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눅21:20)는 말씀은 AD 70년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143일 동안 포위하고 110만명을 죽이는 것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에 팔레스타인 땅으로 고토귀환했다. 이것을 무화과 나무 비유의 성취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차적으로 AD 70년에 예수님의 말씀의 일부가 성취된 것은 맞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궁극적으로 성취된다. 성도는 말씀을 통해서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
사도 바울이 죽기전에 기록한(주후65년경) 디모데전후서를 읽어보면 지금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시대가 말세의 끝부분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
양의 우리 비유
요10:1-6
예수님은 양의 문인 동시에 목자다. 목자는 문으로 들어간다. 이리가 목자의 눈을 피해 양을 잡아 먹듯이 거짓 목자는 문을 통하지 않고 담을 넘어서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절도며 강도라고 말씀하신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가지 않는 자는 모두 삯군이다. 양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알아서 목자의 음성에만 반응한다. 또한 목자는 절대 양을 위험에 처하게 놔두지 않고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장서서 간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 속한 자는 다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어둠에 갇혀 있어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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