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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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發明)[대답]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바울은 종의 신분이 아니고 자유자이었다.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그는 자유자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보았다. 바울은 사도로서 고린도교회를 세웠다.

[6-10절]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自費糧)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주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아 복음 사역에 전념하는 자가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세상에 자비(自費)로 군인이 되는 자가 없고 포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지 않고 양떼를 기르고 그 젖을 마시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다 쓰지 않았고 친히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필요한 돈을 벌었다(행 18:1-3). 그는 신명기를 인용하면서, 소에게 일을 시킬 때 먹이면서 시키듯이, 교회가 일꾼들에게 먹을것을 주는 것은 합당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전임사역자들에게 거처할 곳과 생활비를 제공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고 본다.

[11-12절]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신령한 것’은 복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고, ‘육신의 것’은 의식주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신령한 것은 영원하지만, 육신의 것은 세상에서만 유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물질에 비교될 수 없다. 돈을 가지고 영원한 진리를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가치를 안다면 그 진리를 연구하고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는 일은 아까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결혼할 자유가 있고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 자유와 권리를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3-15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 . .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제물의 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부분은 먹도록 되어 있었다(레 2:3; 7:14, 31, 32).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실 때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다(마 10:9-10). 주의 일꾼들이 그 사역하는 곳에서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권리들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의식주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독신으로 살았다. 그것은 복음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16-17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자원해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오이코노미아)[임무]을 맡았노라.

복음은 영혼 구원의 소식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그죄인들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사람에게 가장 귀한 소식이며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다. 

[18절]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마땅한 의무이므로 거기에서 상을 기대할 것은 없다. 단지, 그의 상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했고 그의 권리를 다 쓰지 않은 데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의무를 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상을 기대할 것이 없지만, 의무 이상을 행했을 때 우리는 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9-21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전통본문에는 없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자유인이지만 주의 교훈대로(마 20:26-27; 23:11-12) 모든 사람에게 종처럼 처신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22-23절]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약한 자들을 대할 때 자신도 약한 자인 것처럼 처신하여 그들을 구원하려 했다. 사도 바울의 행동 원리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이었다. 이로써 그는 복음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복음의 일은 영혼 구원의 일이다. 복음에 참여하는 것은 영혼 구원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을 제한하고 조정하고 심지어 포기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일, 곧 영혼 구원의 일과 참된 교회의 건립을 위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드려야 할 것이다.

[24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달리기 경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출발 지점에서 출발 신호를 받고 달리기 시작하지만, 1등의 상은 한 명에게만 돌아간다. 그 상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달리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치 달리기 경주와 같다. 우리는 상을 얻기 위해 달리는 경주자들처럼 상급을 기대하며 힘써 달려야 한다. 성도는 경주자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벧전 1:9) 곧 영생이며(롬 6:22) 하나님께서 주시는 존귀와 영광이다(롬 2:7). 세상의 모든 것들은 썩는 것이지만, 영생은 영원히 썩지 않을 존귀하고 영광스런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시간 절제, 돈 절제, 힘 절제, 의식주 절제 등 절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6-27절]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람은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되지 않고 바르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교회 봉사자는 단지 열심히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목표와 방법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격투하는 자가 상대를 치지 않고 열심히 허공만 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목표는 영혼 구원의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목표로 삼고 전심전력하였다.

성도도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몸의 욕망대로 따라가면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도자라 할지라도 죄 가운데 빠져 산다면 그는 남은 구원해놓고 자신은 버림받는 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상적 경고라고 본다. 참으로 중생한 자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성경에 종종 나오고 또 필요한 경고이다(롬 8:13). 그러므로 바울은 주께서 주신 영혼 구원의 임무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했고 범사에 절제하였다. 그것은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이었다. 우리의 몸은 편안하고 즐거운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몸이 원하는 대로 살면 실패자가 되기 쉽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절제하고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이기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절제해야 한다. 25절,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 절제하며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교훈하셨다(눅 9:23).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절제할 수 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구원받은 성도는 범사에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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