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성경도 증거한 바이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그 증거로 들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이라는 말은 행위를 가리킨다.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수이다. 의롭다 하심이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지만, 의로운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으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코리스 에르곤)[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증거한 다윗의 시를 인용했다. 그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32:1-2이다. 그것은 사람이 죄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지만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보인다. 이와 같이, 의롭다 하심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9-10절]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인가 후인가?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나오고(15:16), 창세기 16장은 그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고 증거하며,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가 99세라고 증거한다(17: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13년 이전이었다고 보인다.

[11-13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저희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할례 받을 뿐 아니라 또한](원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後嗣)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받은 의를 확증하는 표이었다.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할례자는 단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을 가리키지 않고, 육신의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 그 후손이 온 세계에 충만하리라는 약속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적용되고 그들을 다 포함하는 뜻이 있다.

[14-16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後嗣)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카타 카린)[은혜에 의거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다. 여기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은 다시 대조된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믿는 자는 율법에 순종하며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율법 순종의 행위와는 구별된다.

[17-18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무(無)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 곧 창조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 소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뜻한다. 

[19-22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이미]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생각하지 않고](전통사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백세가 되어 자기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만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며 의탁하는 것이다.

[23-25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때문에] 살아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의 무엇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가 할례의 규례와 율법을 받은 것은 그가 받은 의를 확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할 뿐이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신약 성도들이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을 때, 그들은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것과 같다.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