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1-3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사람은 자기도 악하면서 남의 악함을 판단하기 잘한다. 남의 잘못을 잘 지적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판단의 행위가 그를 정죄하는 셈이 된다. 그의 양심은 자기도 정죄받아야 할 자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실 것이다. 

[4-5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남의 죄를 판단하면서 자신은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 사실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증거한다.

[6-8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엑스 에리데이아스)[혹은 ‘이기적 야망으로’(NASB)]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그의 심판은 공의롭다. 그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신다. 선을 행하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복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9-10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스테노코리아)[곤경, 심한 고생]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평안]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육신에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혼에 더욱 그러하며, 악인은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될 것이다(눅 16:23-25). 악에 대한 이러한 보응은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도 의인의 심신(心身) 곧 육신과 영혼에 다 적용되며, 또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다 적용된다.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12-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편벽되이 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는데도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다 그들이 행한 대로 공의롭고 공평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6:25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킨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며 그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율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대로 행해야 한다.

[16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내용 속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진리가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다(요 5:22; 행 17:31).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17-24절]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형식]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 한 지도적인 인물을 가상적으로 들어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 유대인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 사도 바울은 남을 가르치는 유대인이 도적질하거나 간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그 유대인 때문에 그의 하나님을 욕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형식적인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교인이라는 이름, 더욱이 직분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악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 없이 교인이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교인이라는 이름보다, 또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의롭고 선한 인격과 삶임을 알고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25-29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디카이오마)[의(KJV), 요구(NASB, NIV)]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그람마)[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할 때 가치가 있지, 율법을 범할 때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무할례와 다를 바가 없다.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하지 않겠는가? 할례의 의미와 가치는 율법을 행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가르친다(신 10:16; 렘 4:4). 그것은 마음의 모든 더러움과 완고함을 베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심령의 거룩한 변화인 중생(重生)을 가리킨다. 진정한 기독교는 마음과 내면성의 종교이며 변화된 심령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죄악된 마음 상태로부터 새로워지고 깨끗해지는 마음의 변화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외식을 미워하신다. 성도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자라는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옛날 유대인들처럼 결코 형식적 교회 생활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외식자들에게 화를 선언하셨고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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