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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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를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며, 최후의 선지자로 여긴다.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무함마드의 등장을 세상에 미리 알리기 위해 오신 분이라 하니, 이슬람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보통 '예언자 무함마드' 혹은'라술 알라(Rasul Allah: 신의 사도)'라고 부른다.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신의 계시를 받아 예언자가 되었으며,이슬람을 창시했다.

무함마드 그는 한 종교의 창시자인 동시에 이슬람 이전 시대의 고대 아랍 유목민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악습과 부도덕한 관습을 타파한 사회개혁 운동가였으며, 또한 모든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주장 하에 일생동안 박애정신과 인도주의를 실천한 행동가이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570년 4월 22일, 메카의 지배부족이자 구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쿠라이시족(꾸라이쉬족)의 하심(하쉼 Hashim) 가문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하심 가문은 명문의 일족이었으나, 후일 우마이야조를 이루게 되는 아브두 샴스(압두 샴스) 가문 만큼 혜택받은 입장은 아니었다.

우마이야 왕조: 661년에 무아위야 일세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여 수립한 이슬람 왕조. 중앙아시아로부터 에스파냐까지를 지배하고 서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전하기도 하였으나 750년에 아바스 왕조에게 멸망하였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압달라 Abdallah)는 시리아 쪽으로 나가던 카라반의 상인으로 그의 탄생 직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 아미나(Amina bint Wahb)도 그가 여섯 살 때 사망하여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 후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압둘 무탈리브(압둘 무딸립 Abdul Muttalib)에게 맡겨졌으나, 2년 뒤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하심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된 숙부 아브 탈리브(아부 딸립 Abu Talib)의 보호 하에 양육되었다.

어린 시절 양치기를 하며 평범하게 성장한 무함마드는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이 되어, 부유하고 고결한 성품의 미망인 카디자(Khadijah)의 대상에 고용되었다.
무함마드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에 감동한 카디자가 구혼하여, 무함마드는 595년에 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2남 4녀가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카디자의 실제 나이는 그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함마드의 두 아들은 유년기에 사망했으며, 딸들 중에서도 파티마(파띠마 Fatima)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사망했다.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 생활에 여유를 얻게 된 무함마드는 40세가 된 610년,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이 바로 《코란》 제9장(응혈)에 적혀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고, 신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전하는 '신의 사도'가 되었다.
부인 카디자가 최초의 신도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종전까지의 다신교(多神敎)를 부정하고 유일신(唯一神) 알라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며, 처음에는 메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층민들과 중소상인 계층만 그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그의 지지자는 극소수였으므로 대(大)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층은 그의 선교활동에 무관심했으나, 점차 추종자 수가 증가하여 메카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613년경 포교활동 개시 후 처음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아비시니아로 피신하자, 그곳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받았으나 무함마드 자신은 전부터 타협을 해 두었던 야스리브(후의 메디나)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622년 9월 24일 아부 바크르 등 70여 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야스리브로 갔다.
이를 히즈라(헤지라:聖遷이란 뜻)라고 하는데, 훗날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622년 7월 16일).

당시 메디나에는 내분이 있었으나 무함마드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의 모체를 만들어내었다.
무하지룬(히즈라에의 동행자)과 안사르(메디나에서의 협력자)가 그 중추를 이루어 이슬람교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624년에는 메카의 대상(隊商)을 습격하는 동시에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함으로써 메카 정복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 대상 습격을 계기로, 바드르에서 메디나측과 메카측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는데, 메디나측이 수적으로 우세한 메카측을 무찔러 의기가 충천하였다.
메카측은 무함마드 박해의 최선봉장이던 아부 자푸르가 전사한 후로는 아브두 샴스 일문(一門)인 아부 수피안이 부족장이 되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듬해인 625년 우후드산(山) 밑에서 메디나측은 재차 메카측과 교전하여, 메디나측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무함마드의 사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그 후로는 당분간 내정(內政)과 포교에 힘썼다.
이 무렵 이슬람교도에 대한 협력이 기대되었던 유대교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메디나측에 대해 대항하던 쿠라이저족(族) 등이 무함마드의 명령에 의해 멸망되는 일 등이 있었다.

무함마드 메카입성
627년에는 메카군(軍)이 메디나를 포위하였으나, 페르시아 사람인 사르만의 헌책(獻策)을 받아들여, 도시 주위에 큰 도랑(한다크)을 파 방어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이전투를 한다크 전쟁이라고 불렀다.
628년 메카 교외인 후다이비야에서 메카측과의 화약(和約)이 체결됨으로써, 이듬해에는 메카 시민들이 일시 대피한 가운데 메디나측 시민의 카바(Kabah) 순례가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630년 1월 무함마드는 메카로 군대를 진격시켜 10월에 메카에 도달하였다.
마침내 아부 수피안이 항복하고, 11월에 약간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무함마드는 메카로 입성하여, 카바 신전에 안치된 많은 우상을 부수고 화상(畵像)도 지워버렸다.
그때의 감격은 《코란》 제17장(밤의 여행) 가운데 있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무함마드의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은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무함마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만일 무함마드가 창조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는 분명하고도 합당한 증거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무슬림 들은 어떤 근거로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여기는 것일까?

무함마드가 선지자인 증거를 입증하는 자료들을 찾아보니 대부분 후대에 그를 칭송하는 내용들 일색이었다. 그래서 미화되지 않은 이슬람 내부의 일차 자료들(꾸란과 하디스 및 씨라)을 찾아보았는데 재미있는 사실 몇 가지를 발견했다. 그가 선지자라는 표징이 그 육체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의 하디스를 보자.

하디스(아랍어: حديث نبوي)는 무함마드가 말하고(Qaul), 행동하고(Fi'ul), 다른 사람의 행위를 묵인한(Taqreer)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하디스는 꾸란(코란), 이즈마, 끼야쓰와 함께 샤리아(이슬람법)의 4대 원천을 이루며 그 중 꾸란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야지드의 아들 앗싸입이 전하기를, 우리 고모가 나를 선지자께 데리고 가서 오 알라의 선지자여 내 조카가 발에 병이 났어요.”라고 말했더니 그 분이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알라의 복을 빌어 주셨어요. 그리고 세정의식을 하셨고 나는 남은 물을 마셨어요. 내가 그분 뒤쪽에 서 있었을 때 그분의 양 어깨 사이에 있는 선지자 됨의 표식을 보았는데 그것은 혹 또는 사마귀처럼 보였어요.(부카리의 하디스 : Volume 1, Book 4, Number 189)

 

중동, 특히 메카 지역에서는 털이 무성한 혹을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표징으로 보았다고 한다. 무함마드에게 그 특별한 신체적 조건인 혹이 있었다는 것을 이슬람의 제2경전이라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첨단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의 풍습 때문에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하디스에 이런 장면도 등장한다. 무함마드가 자신의 고향인 메카에서 자칭 선지자라고 주장하다가 핍박을 받고 메디나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러자 메디나 사람들은 그가 선지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안나스가 전하기를, 쌀라마의 아들 압둘라가 선지자께서 메디나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그분께 가서 선지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세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는 무엇입니까? 낙원에서 제일 처음에 먹는 음식은 무엇입니까? 어떤 태아는 왜 아버지를 닮고 어떤 태아는 어머니를 닮습니까?” 그때 알라의 선지자께서는 방금 가브리엘 천사가 내게 해답을 알려 주셨노라. 마지막 때의 징조는 사람들을 동쪽과 서쪽에서 모으는 불이니라. 그리고 낙원에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먹는 음식은 생선 간의 외엽이니라. 아이가 부모를 닮는 것은 부부관계를 할 때 남편이 먼저 사정을 하면 아이는 아버지를 닮고 아내가 먼저 사정을 하면 아이는 어머니를 닮느니라.” 이에 압둘라는 당신은 알라의 선지자이십니다.”라고 말했다. (부카리의 하디스, volume 4, Book55, Number546)

여기서 무함마드가 말하는 심판 날의 징조는 성경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또한 천국의 음식이 생선의 간이라는 것도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대답은 현대 과학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주장이다. 이것이 꾸란을 전달해 준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라면 꾸란도 역시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차 자료들이 무함마드가 선지자인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충분치 못하며, 오히려 그가 선지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뿐이다. 반면 우리가 무함마드를 도저히 선지자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 몇 가지를 제시하자면 아래와 같다.

첫째 : 그는 자신의 구원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래 하디스를 보자.

카리자 빈 자이드 빈 타비트가 전하기를 무함마드에게 충성을 맹세한 안사리 여인 중 움알 알라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카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제비를 뽑아서 배당해 주었는데 우리에게는 마준의 아들 우트만이 배당되었어요. 우리는 그를 집에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어요. 그런데 그가 심한 병에 걸려서 죽었어요. 그의 시신을 씻겨 수의를 입힐 때 알라의 선지자께서 오셨어요. 

내가 오 싸이브의 아버지여 알라께서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알라께서 그대를 영화롭게 하신 것을 확증합니다.’라고 했더니 알라의 선지자께서는 알라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을 그대가 어찌 아는가?’라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오 알라의 선지자여. 우리 아버지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거니와 그보다 더 알라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누군가요?’라고 했더니 선지자께서는 그가 죽은 것은 확실합니다. 

나도 역시 그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알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내가 알라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알라께서 나를 어떻게 하실지조차 나는 모릅니다.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죽은 자의 신앙심을 보증해 본 일이 없습니다.’(부카리의 하디스: Volume 2, Book 23, Number 334)

자신의 구원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을 선지자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둘째 : 그는 천사와 사탄의 계시를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아래 하디스를 보자.

알라의 선지자는 자기 추종자들이 평안하게 살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 화해하려고 했다. 그 때 알라의 계시가 내려왔다. ‘그대는 라트와 우짜와 세 번째 마나트 그리고 그 외의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느냐? 그 때 사탄이 두 구절을 그의 혀에 넣어 주었다. ‘그들은 높이 나는 학과 같도다. 그들의 중재는 열납되느니라.’ 

그 후 가브리엘이 알라의 선지자에게 와서 무함마드여! 그대는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대는 내가 알라로부터 받아서 그대에게 전한지 않은 것을 사람들에게 낭송했도다.”라고 꾸짖자 알라의 선지자께서는 내가 알라의 뜻을 어기고 위조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을 그분의 말씀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라고 하셨다.(The Life of Muhammad: Sirat Rasul Allah, Muhammad ibn Ishaq, translted by Alfred Guillaume, Oxford Press,165-166)

천사의 계시와 사탄의 계시를 분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선지자라고 부르며 따라갈 수 있겠는가? 후에 그는 자신이 사탄의 계시를 받았던 경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전에 있었던 다른 모든 선지자들도 사탄의 계시를 받았었다는 주장을 했다.(꾸란 22:52)

▲ 동굴 속에서 기도하고 있는 무함마드

 

셋째 : 그는 자신을 찾아왔던 천사가 누군지 몰랐다

무함마드가 메카 주변의 언덕에 있는 히라 동굴에서 첫 번째 천사의 방문을 받았을 때 그 천사는 질식할 정도로 그의 목을 조르고 읽지도 못하는 그에게 읽으라고 강요했다. 무함마드는 이 일을 겪은 후 공포에 사로잡혀 아내 카디자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아내의 위로로 간신히 진정되었다.

무함마드 부부가 와라까 빈 나우팔이라는 노인에게 찾아가 이 일을 상담하였더니, “그분은 알라께서 무싸에게 보내셨던 그 나무스(Namus)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그 노인은 그 말을 한 뒤 며칠 후에 죽었고 계시는 오랫동안 멈췄다. 무함마드는 너무 괴로워서 몇 번씩이나 산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했다.(부카리 하디스: Volume 9, Book 87, Number 111) 후에 무함마드는 자기를 찾아왔던 것이 가브리엘 천사였다고 주장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천사가 나타나는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천사는 그렇게 무례한 적이 없으며 항상 두려워 말라, 나는 아무개니라. 나는 이런 일로 보냄을 받았노라고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찾아온다. 그가 천사라고 주장하는 존재를 만나고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을 볼 때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접신현상과 유사한 경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 그의 계시는 성령과는 정반대의 근원에서 나왔다

성령께서는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게 하신다(고전12:3). 그러나 꾸란에서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는 이미 불신자라고 한다(꾸란5:17).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속의 계획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요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나 꾸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고(꾸란4:157),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한다(꾸란19:88-91).

이를 볼 때 무함마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온 선지자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다섯째 : 그는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정상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선택해서 쓰시는 사람들이 항상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무함마드의 잔인함은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는 주후 627년에 유대인 꾸라이자 족속이 그의 적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약 600-900명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객을 보내서 살해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스마 빈트 마르완이라는 여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그 여인은 메디나 사람들이 자기들의 족장이 무슬림들에게 항복한 후에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죽음이 두려워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을 비난했다.

그 일을 전해들은 무함마드는 누가 그녀를 없앨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 밤에 우마이르라는 병사가 자녀들과 함께 평화로이 잠자고 있던 그녀를 죽이고 돌아와서 보고했다. 무함마드는 그대는 알라와 그 선지자를 도왔다고 그를 칭찬하면서 사람들에게 카트마 사람들아, 내가 마르완의 딸을 죽였다. 불만 있는 자는 지체 말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카트마 사람들은 강력해진 이슬람의 힘이 두려워서 그 사실을 덮어두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여섯째 : 그는 성경을 변질된 책이라고 주장했다

신구약 성경은 주전 15세기 모세 오경이 기록된 후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진리로 보존되어 온 기독교와 유대교의 경전이다. 그런데 무함마드는 주후 624년 메디나의 통치권을 쥐고 난 후에 성경은 변질된 책이고 꾸란만이 진리라고 선언했다. 자신이 계시 받았다는 꾸란의 내용이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의 비난에 대한 대응이었다.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인터넷에 공개된 고대 사본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이 고대에 쓰여진 바로 그 성경 내용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꾸란은 변경되었고(부카리 하디스:V6,B61,No.512), 취소되었고(꾸란2:106), 대체되었다(꾸란16:101)고 하는 증거가 너무나도 많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는 꾸란의 구절이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든가, 지금은 73절까지 있는 꾸란 33(Ahjab) 286절까지 있는 꾸란 2(Baqarah)보다 더 길었었다는 것은 많은 유력한 하디스들이 증거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꾸란은 번역도 하지 말고 7세기 문어체 아랍어로 그냥 외우기만 하라고 하는 것이다.

 

▲ 무함마드가 사탄의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을 모티브로 하여 [사탄의 계시]라는 소설을 쓴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 이 소설이 무함마드를 모독했다 하여 무슬림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고 있다

 

일곱째 : 그는 자신이 최후의 선지자라고 주장한다(꾸란33:40)

예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시록22:13)고 하셨는데 7세기에 무함마드가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취소하고 자기가 마지막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1:1-2)고 하셨는데, 마지막 이후에 또 다른 마지막을 주장하는 사람을 정상적인 선지자로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외에도 무함마드를 선지자로 인정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여기에 제시된 몇 가지만 생각해봐도 그가 선지자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을 진리로 믿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심히 안타깝다. 영국에서 사역하던 한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80%가 기독교를 믿던 사람이라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한국 교회가 유럽교회처럼 몰락하여 이슬람화 되기 전에 교회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이슬람의 정체를 바로 알아 하루 빨리 성도들을 가르쳐야 하겠다는 절박한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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