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life365(주신삶에 감사하자)

    • 예레미야
    • 에레미야가 본서의 저자인 것은 내, 외적으로 모두가 지지하는 바이다. 내증은 본서(1;1, 36:1,2) 뿐만 아니라 구약(대하 36:21, 스 1:1, 단 9:2) 과 신약(마 2:17,18, 21:13, 막 11;17, 눅 19:46)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외증으로서는 외경 집회서, 탈무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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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만 본서가 예레미야의 구술(口述) 에 의한 동역자 바룩(Baruck) 의 대필(36장) 과 내용 첨가((제 52장) 라는 과정을 통해 기록된 책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 이런 대필에 의한 기록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는 과정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롬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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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본서는 A.D.18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이 예레미야의 자작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A.D.19세기에 이르면서 비평학자들에 의해 본서의 저자 문제에 이의가 제기 되기 시작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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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 비평학자들은 본서의 내용이 대체적으로 예례미야의 예언인 것은 인정하나 여기에는 순수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아닌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평학자들은 대표적인 견해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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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째는 본서를 예레미야의 동역자였던 바룩의 편집으로 보는 견해이다.
    • 이 견해에 의하여보면 본서에서 예레미야의 전기적(·傳記的)인 부분은 바룩의 직접적인 창작이요, 예레미야의 설교 부분은 바룩이 첨삭하여 ‘신명기 체제’로 편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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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째는 본서가 시체(詩體)와 산문체(散文體) 등의 다양한 문체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본서를 B.C.4세기 경 익명의 편집자가 여러 편의 단편, 곧 시체(詩體)의 예언 집, 산문체의 예레미야의 전기 집 등을 수집하여 편집하였다는 견해이다.(Oesterley Rob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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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셋째는 본서의 일부를 후대 필사자의 삽입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 즉, 혹자는 본서의 2/3 가량을 후대의 삽입으로 보는가 하면(Dhum), 또 다른 사람은 본서의 10:17 이 9:26에 연결 되는 것이 자연스러우므로 그 중간 부분인 10:1-16은 후대의 삽입구이며, 또 17:19-27, 25:15-38, 30:1-31, 46:1-51:64 등도 예레미야의 다른 부분과 조화 되지 않으므로 이 역시 후대의 삽입구라고 주장한다.(Cornill).그렇지만 이상과 같은 예레미야 순수 저작 부인설은 성경의 형성 과정이나 다양한 문체에 대한 오해나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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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 바룩의 편집설은 본서의 바룩에 대한 대필을 근가로 한 확대 해석과 상상적 추정을 가미해서 내린 억측에 불가하며, 또한 수집설이나 후대 삽입설도 성경의 다양한 문체의 사용이나 여기에서 오는 내용의 부분적인 단절 등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억측인 것이다. 사실 바울은 로마서를 그의 서기 더디오를 통해서 대필 했을 뿐아니라, 이 과정에서 더디오 역시 로마의 성도들에게 개인적인 안부를 가필했지만, (롬 16:22), 로마서를 더디오 저작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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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본서의 저자인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아나돗’에서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렘 1:1). 원래 제사장직이 영구적인 세습적임을 감안 할 때 (렘 21:17-23) 그 역시 제사장 출신 선지자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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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그가 태어난 시기는 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므낫세 통치 기간(B.C.697-642년)이고, 이런 암울한 시대적 상황은 예레미야 선지자로서의 출생(렘1:5)이 필연적으로 말해준다. 물론 그가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았을 때에는 약 20세 정도가 되었을 때인 요시야 왕 12년 곧 B.C.627년이었다. (렘 1:2, 25:3). 이 때는 젊은 왕 요시야(B.C.640-609년)에 의해 종교 개혁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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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시야 왕은 선왕들인 므낫세나 암몬과는 달리 우상 숭배를 철저히 거부했을 뿐아니라 예루살렘 경내에 있는 이방신의 신당과 아세라 목상들을 모두 철거해 버리는 과감한 종교 개혁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왕하 23:15). 요시야 왕이 이런 개혁 조치는 다윗과 솔로몬 왕 이후로 국가의 존재 의의를 망각한 채 패역되게 행함으로 여호와의 심판을 향해 치닫던 유다에게는 마지막 구원의 등불과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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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시기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것은 실로 의의 심장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예레미야의 구체적인 역할을 확인 할 길은 없지만, 그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음 5년 후인 즉 요시야 왕 16년(B.C.622년 )에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고 (왕하 22;8),이로 말미아아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가일층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는 바(왕하 23:1-25), 여기에서 우리는 요시야의 개현 정책에 예레미야가 어떤 방식으로든 협조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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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유대 전승은 요시야 왕의 개혁 정책의 중요한 고문이었던 제사장 힐기야(왕하 23;4, 대하 35:8) 를 예레미야의 형제로 전하나 지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요시야 왕이 애굽 왕 느고와의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였을 때에 (B.C.609년, 왕하 23:28-30).예레미야가 애가를 통해 극도의 슬픔을 표현한 것은(대하 35:25), 그의 요시야 왕과 그의 개혁 정책에 대한 지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이처럼 예레미야의 일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심리적 변화 또한 많은 빛깔을 지니고 있다.
    •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는가 하면(렘 15;10-21),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득 없는 자신의 소명을 불평하기까지 하기도 했다.(렘 20:9). 이런 힘겨운 세월을 보낸 예레미야는 마침내 유다의 멸망을 통해서도 교훈을 받지 못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고생스런 생애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지자 직을 끝까지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로 받은 소명에 대한 확신 대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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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그의 확신은 최악의 사태를 당하였을 때 에 그를 지탱해 주는 버팀이한편 본서의 기록 연대는 예레미야의 사역 기간만큼 길게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본서의 기록 연대는 요시야 12년 곧 B.C..627년부터 예루살렘 멸망 (B.C.586년)이후 유다인들이 애굽에 이주하여 정착한 B.C.580년 경까지로 상정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바룩에 의해서 첨가한 것으로 보는 제2장은 여호야긴이 바벨론 감옥에서 방면된 시기인 B.C.562년 이후에 기록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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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서의 역사적 배경

예레미야의 예언 시기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한 기원전 626년, 앗수르는 급속히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는 바벨론 및 메데에게 함락되었습니다. 기원전 605년, 느부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은 애굽을 물리치고 근동에서 유일하게 남은 강국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605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꼭두각시 왕을 세웠습니다. 기원전 586년, 그들은 예루살렘 인구의 대부분을 메소포타미아로 포로로 잡아가 버렸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애굽으로 끌려갔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역사의 대부분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유다의 공포와 패배를 통해 하나님의 형벌이 유다 위에 임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회개하고 우상 숭배를 그만 두라고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유다에 임박한 형벌의 원인이었습니다. 그 형벌과 심판은 유다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묘사된 기근, 전염병, 역병, 전쟁과 같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준비시키셨고 그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유다의 징벌의 도구로 사용하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나라를 멸망시키는 자"(4:7)인 앗수르는 유다에게 "재앙"(4:6)을 가져올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너희 자신의 행위와 행동이 너희에게 이런 일을 가져왔다. 이것이 너희의 형벌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을 벌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범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 역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에게 적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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