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2장의 증거대로, 아기 예수께서는 얼마간의 애굽의 피난생활 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와서 사셨고, 그래서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었다. 또 요한복음 1:45에 보면,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우리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만났는데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하였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열일곱 번이나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마 26:71; 막 14:67; 16:6; 눅 4:34; 18:37; 24:19; 요 1:45; 18:5, 7; 19:19; 행 2:22; 3:6; 4:10; 6:14; 10:38; 22:8; 26:9).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는 30세까지 안식일마다 참석하셨을 그 회당에서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이제는 그가 일하시는 때이었다. 사람은 겸손히 배우며 자라야 할 때가 있고, 또 일하며 가르쳐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또 교회가 요청하는 때에 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동네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아는 지식이 없었다. 그들은 그가 가르치는 말을 듣고 그가 어떻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고 놀라며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통해 그가 사람의 지혜와 능력 이상의 것을 소유하신 분이심이 증거되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보다 지혜와 능력의 차이이다.
[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요세스]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 알고 있었고 또 그의 동생들이 야고보와 요세스와 유다와 시몬이며 또 그의 누이들도 그들과 함께 있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배척했다. 마태복음 13:55는 그들이 그를 목수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또 그의 동생들의 이름도 언급했다. 그들에게 예수는 목수의 아들 목수이며 그의 동생들의 형제, 즉 단지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가 신적 본질과 속성을 가진 자가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처럼 그는 사람이며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을 듣고 그의 능력의 일들을 보았지만 무지와 완고함 때문에 그를 거절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4-6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선지자는 자기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선지자의 어린 시절의 연약한 모습을 기억하고 그를 무시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고향 나사렛에서는 몇 사람의 병자들에게만 안수해 고치셨다. 그는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치 않으셨다. 믿을 만한 상황에서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앙은 기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든지 영접하지 않든지 모든 마을들에 이곳 저곳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종들은 환경여건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7절]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열두 제자들이 전도를 위해 둘씩 보냄을 받은 것은 예비적 일이었다. 주께서 제자들을 둘씩 보내신 것은 증거의 확실성과 상호협력을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증거보다 두 사람의 증거는 더 힘이 있고 확실하다. 또 제자들은 서로 위로하고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전 4:10). 하나님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동역자(同役者)들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의 부족을 보충하며 서로를 붙들어 줄 수 있다.
[8-9절]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주께서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해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돈이나 가지지 말고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전도자의 삶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는 삶이므로, 전도자는 세상의 걱정 근심을 가급적 초월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도자들이 저축이나 보험이 필요 없다고 지나치게 생각할 것은 없다고 본다. 범사에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고 저축하며 사는 것은 모든 성도의 기본적 생활 태도이어야 할 것이다.
[10절]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이것은 전도자가 한 지역에서 이집 저집 이동함으로써 부덕(不德)한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전도자의 삶은 편안함을 위해 택한 길이 아니고 주와 함께 고난에 참여해야 할 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거하게 된 집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거기에 만족하며 더 나은 곳을 찾아 이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8).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의 백성과 자기의 종들을 굶주리게 하지 않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
[11절]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저 성보다 더 견딜 만하리라](전통본문) 하시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전도자들을 영접할 것이며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이다. 주께서 보내신 전도자의 말을 거절하는 죄는 죄들 중에 매우 큰 죄로 간주되었다. 주께서는 전도자의 말을 거절하는 죄가 옛날 유황불비로 소멸되었던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12-13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은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였고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 그들이 나가서 한 활동은 두 가지이었다. 하나는 회개하라고 전파한 것이다. 세례 요한도 회개를 전파했다(막 1:4). 예수께서도 회개를 전파하셨다(막 1:15). 사도 바울도 전도 활동을 할 때 회개를 전파했다고 증거했다(행 20:21). 하나님의 뜻은 회개, 즉 죄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죄를 깨닫고 버리고 떠나야 한다.
[14-16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열두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유대 땅에 더욱 알려졌다. 헤롯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듣고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활동하느니라”고 말했다. 본문의 헤롯은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스로서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하였었다(주전 4년-주후 39년). 누가복음 9:7에 보면, 헤롯은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해하였다.
[17-20절]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에네코)[원한을 품고]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많은 것을 행하며](전통본문) 달게 들음이러라.
헤롯 안디바스는 그의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고 세례 요한은 그것이 옳지 않은 행위라고 지적했었다. 그의 지적을 불쾌하게 생각했던 헤로디아는 요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해 보호하며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달게 듣고 그의 교훈을 따라 선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하였다.
[21-29절]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女兒)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본문은 세례 요한이 어떻게 순교로 생을 마쳤는지 증거한다. 세례 요한은 옥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의 제자들은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였다. 헤롯 왕은 공의보다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중시하였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직을 버리고 가난하고 거친 환경의 삶을 택했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경건하게 생활했다. 그는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했고 또 용기 있게 왕의 잘못을 지적했다. 헤롯 왕도 그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임을 알았고 그를 두려워했고 그의 말을 듣고 선한 일을 많이 행했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쓸쓸히 목 베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았다.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살다 가야 한다.
[30-33절]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사도들은 돌아와 예수께 모여 그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보고하였다. 그들이 행한 것은 병고친 일들이며 그들이 가르친 것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선포했을 뿐 아니라 또한 가르쳤다. 그들은 회개와 믿음이 무엇인지, 사람이 왜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지 설명했을 것이다. 전도는 선포와 가르침을 포함한다.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께서는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 당시의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바른 교훈과 인도를 받지 못했으나 바른 말씀을 갈망하여 원근 각처에서 모여왔다. 그들은 바른 말씀에 흥미가 없는 교인들과 달랐다.
[35-37절]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2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요한복음 6:7에 보면, 빌립은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백 데나리온의 떡이[2백 데나리온 어치의 떡을 가지고도] 부족하리이다”라고 말했다. 2백 데나리온의 돈도 없었겠지만, 비록 그런 큰 돈이 있다 하더라도 갑자기 어디서 그 많은 수량의 떡을 구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싣고 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께서는 그 저녁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신적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38절]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사람들에게는 먹을 떡이 없었다. 제자들이 알아 보고 얻은 음식은 단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것은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이었다(요 6:7). 그 아이는 그것을 예수님께 기꺼이 바쳤다. 그것을 바치기 싫어했다면, 강제로 빼앗아 주님 앞에 가지고 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자기도 배가 고팠을 텐데 그것을 바쳤다. 이 작은 것, 그러나 그 귀한 것을 가지고 주께서는 그 저녁에 기적을 행하셨다.
[39-40절]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마가복음은 주께서 무리들을 ‘푸른 잔디’(클로로스 코르토스) 위에 앉게 하셨다고 더 생생하게 증거한다. 푸른 잔디밭은 그 날 저녁 무리들의 야외식당이 되었다. 주께서는 무리를 백 명씩, 오십 명씩 질서정연하게 앉히셨고 그러므로 그 저녁 그 기적의 떡을 먹은 자들의 수는 쉽게 파악되었다. 무리들은 무슨 음식이 나올 것인가 궁금했을 것이다. 그보다 제자들은 어디에서 이 많은 무리를 먹일 음식이 공급될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염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실 일을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용히 그의 하시는 일을 기다려야 한다.
[41절]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매.
‘축사하다’는 원어(율로게오)는 ‘감사하다, 축복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감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런데 그 저녁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줄어들지 않고 없어지지 않았다. 제자들과 무리들, 또 그 음식을 주님께 드렸던 아이는, 너무 감격적인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그 날 저녁의 일은 결코 잊혀질 수 없었을 것이다.
[42-44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그 날 밤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그 기적의 떡을 배불리 먹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육신적 필요를 풍성히 공급하셨다. 남은 떡을 거두게 하신 것은 기적의 떡이 오용되지 않게 하시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기념물을 신성시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다. 떡을 먹은 사람들은 남자가 5천명이었다. 마태복음은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라고 증거한다(마 14:21).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만명은 넘었을 것이다. 떡 기적의 일은 만여 명의 증인을 가진 사건이었다.
[45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벳새다 건너편으로](KJV, NASB) 가게 하시고.
무리들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다 먹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벳새다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다. 누가복음 9:10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벳새다에서 일어났다고 증거한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해안 지역에 있고, 북에서 갈릴리 호수로 들어오는 요단강의 동쪽에 있다. 또 본문 53절과 마태복음 14:35는 그들이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요한복음 6:17, 24-25는 그들이 가버나움에 왔다고 말한다. 게네사렛 땅은 벳새다 건너편 곧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가버나움과 게네사렛 마을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 명칭이었다고 보인다.
[46절]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무리를 다 보내셨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었고 밤이 깊었을 것이다. 그는 무리를 작별하신 후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그가 밤 4경, 곧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신 것을 보면, 그는 그 밤에 여러 시간 동안 기도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다. 그는 새벽기도에 힘쓰셨고(막 1:35) 밤기도에 힘쓰셨다. 신성(神性)을 가진 그에게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으셨을 터인데도 그는 기도에 힘쓰심으로 우리의 모범이 되셨다.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47-48절]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거스르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날은 저물어 밤이 깊었고 배는 바다 가운데 있었고 예수님은 홀로 육지에 계셨다. 그런데 마귀가 떡 기적 사건을 샘내어 바람을 격동시키기라도 한 듯이, 이상하게도 거친 바람이 제자들의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젯저녁에는 기쁨과 감격이 넘쳤으나 지금 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상에는 평안과 고난이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평안한 때에 우리는 너무 기뻐하여 자만하지 말고, 고난의 때에 너무 낙심하여 하나님이 어디 계신가 하며 불신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바람 때문에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셨다. 그는 멀리서도 모든 것을 보셨다. 밤 사경 즈음, 즉 새벽 서너 시경에 그는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다. 그 깊은 밤에, 그 바다 가운데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을 제자들에게 그는 친히 가까이 오셨다. 그는 오늘날에도 세상의 풍랑 속에서 분투하는 성도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도우실 것이다.
[49-51절]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매우] 심히 놀라니[놀라고 의아해 하였으니](전통본문).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배에 오르시자 바람은 그쳤다.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라고 의아해 하였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은 기적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다.
[52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신 것은 그가 물 위로 걸어오심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들이 그때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다면 그가 물 위로 걸어오심을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깨닫게 되었다. 마태복음 14:33에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았고 깨닫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53-55절]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오니.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 해안의 벳새다에서 갈릴리 북서쪽의 땅으로 건너갔다. 요한복음은 그들이 가버나움으로 갔다고 기록한다(요 6:17, 24-25). 게네사렛 땅은 게네사렛과 가버나움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일컫는 명칭이다. 사람들은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그가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왔다. 사람들은 병고침을 위해서 열심을 가졌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을 품어야 한다.
[56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건강함]을 얻으니라.
병자를 시장에 두었다는 표현은 주께서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전도하셨기 때문이다. 이전에 혈루증 여인처럼,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원했고 옷가에 손을 대는 자는 다 병고침을 얻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영광을 나타낸 일들이었다.
풍랑 이는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곁에 계신 구주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사랑하고 순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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