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QT 로마서 7장 1~25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몽학선생)
[1-3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음란한 여자]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음란한 여자]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증거한다.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음란한 여자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쪽이 죽었으므로 그와의 부부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이다.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고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인격과 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은 구원 얻기 전의 상태를 가리키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라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죄의 정욕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구원 얻기 전에는 죄성이 우리를 지배하였고 죄의 정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기관들에 역사해 우리로 사망에 이르는 행동을 하게 했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되고 변명으로 무마되었다.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NASB, NIV)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얽매였던 것’이라는 말은 율법의 규례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바울은 6:14에서도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였다.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다(5:1). 바울은 그 책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라는 말에서 ‘영’이라는 말은 성령을 가리키며(NASB, NIV),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조문을 가리킨다고 본다(고후 3:6도 비슷함).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큰 힘이 된다. 때때로 성도에게 죄와 연약이 있으나 그가 낙심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의와 거룩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이 자유가 큰 힘이 되는 것이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제까지 말한 내용이 율법을 정죄(定罪)하는 인상을 줄지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이 죄인가?’라고 묻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이 없었다면 사람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다.
[8-11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전에 율법이 없을 때는 죄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나 자신의 존재가 살아 있는 것 같았으나, 율법이 이를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면 율법을 통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고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심히 죄악됨을 깨달을 뿐이다. 영생에 이르게 할 율법이 실제로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는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고 죽게 하였다.
[12-13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자체는 죄악되지 않다. 율법은 실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신령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디모데전서 1:8에서도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말했다. 율법은 바른 정신으로 사용하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선하고 유익하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었을 수 없다. 단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그 선한 율법으로 우리를 죽게 한 것이다. 이로써 죄가 심히 죄악됨을 드러낸 것뿐이다.
[14-1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는 선악간의 싸움이 있다. 바울은 ‘나는’ ‘나의’ ‘내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싸움을 표현한다. 성도에게는 육신의 연약성 곧 죄성(罪性)이 남아 있다. 이 죄성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행치 못한다. 율법은 영적이지만, 나는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이다. 나는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려 있고 때때로 원하는 것을 행치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다.
[16-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율법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6절이나 8:1에도 쓰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를 가리킨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에게 있어서 범죄의 주체는 참된 자아가 아님을 증거한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속사람’(22절) 혹은 ‘새 사람’(엡 4:24)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생명 안에서 살려 하지만, 성도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어 율법을 거슬러 죄를 짓게 한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참된 자아의 행위가 아니고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18-20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육신’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몸’(소마)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성도의 남은 죄성은 육신 즉 몸에 있다고 보인다. ‘원함이 내게 있다’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선을 원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새 사람의 소원이요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성향이다. 구원 얻은 사람만 이러한 소원을 가진다. 구원 얻기 전에는 이런 소원이 없었고 단지 때때로 양심의 가책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구원 얻은 후에도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다. 이것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죄성과 연약성인 것이다. 선을 원하는 것은 참된 자아요, 선을 원치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성이다. 그것이 우리 몸에 남은 옛 사람의 성질인 것이다.
[21-23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누스)[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성도는 자신 속에 두 가지 모순된 성향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는 참된 자아의 소원으로서 선을 행하려 하는 성향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몸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다. ‘속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의 참된 자아를 가리킨다. 중생한 참 자아는 ‘마음’(누스) 곧 생각(mind)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다른 한 성향이 있어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온다. 성도 속에는 이 대립된 두 가지 성향이 있어 항상 내면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24-25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누스)[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의 탄식은 성도들의 탄식과 신음이다. 마음의 성향과 육신의 성향의 싸움으로 성도는 피곤해진다. 성도는 당연히 이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과 성화는 이러한 싸움과 탄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죄에 대해 점점 죽고 의에 대해 점점 산다. 하나님의 구원은 효력이 있고 승리적이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지만, 성도들이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의롭다 하심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義人)으로 인정받았다. 성도는 때때로 죄에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의를 이미 얻었고 최종적 구원과 영생도 보장되어 있다(롬 8:30; 빌 1:6). 이 최종적 구원은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에는 아직 죄성이 남아 있다. 구원 얻은 성도에게는 이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면적 싸움이 항상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7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때때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하고 신음하며 탄식한다. 그러나 성도는 탄식과 신음 속에서 점점 거룩해져간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도는 이미 얻은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기업의 보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과 자유 속에서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