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신약) QT/마가복음

오늘의QT 마가복음 8장 1~38절 베드로의 신앙고백(7병2어 기적)

nice365 2021. 7. 9. 10:10

[1-3절]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그때에 심히 큰(팜폴루 pampovllou)(KJV) 무리가 주 앞에 모여 있었고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 그 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에게 물질적 유여함이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그곳은 광야이었고(4절) 그들은 이미 사흘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큰 열심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그들이 길에서 기진할 것을 염려하셨다.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딱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떡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두 번째 떡 기적은 무리를 불쌍히 여김에서 나왔다.

[4-7절]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도무지 인간적으로는 대책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많은 무리를 위해 떡을 살 돈도 없었겠지만, 돈이 있다 하여도 그 많은 분량의 떡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가진 것은 떡 일곱 개뿐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들 앞에 놓게 하셨다. 그는 작은 것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제자들은 그 떡을 무리들 앞에 놓았다. 또한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었는데, 주께서는 축복하시고 그것도 그들 앞에 놓게 하셨다.

[8-10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약 4천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그 날, 놀라운 기적이 다시 일어났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다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나 거두었다. 그 떡을 먹은(호이 파곤테스) 사람들은 약 4천명이었다. 마태복음 15:38은 떡을 먹은 사람이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약 4천명’이라고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15:39의 전통본문은 그들이 ‘막달라’ 지경으로 가셨다고 증거한다. 막달라는 갈릴리 바다의 서쪽 해안 중간지점에 있는 마을이었다.

[11-13절]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詰難)하며(쉬제테오)[변론하며](BDAG)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기적은 사람의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호기심거리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려는 자들에게 유익이 되나, 믿으려는 마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을 보았으나 그를 믿지 않았다(요 12:37).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의 기적들을 보고 믿었고, 또 오늘날에는 그것들을 기록한 신약성경의 증거들을 읽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요 20:30-31).

[14-16절]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므로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었을 때, 주께서는 그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씀도 하셨다(마 15:6).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라고 말하였다. 제자들은 떡의 누룩을 생각하였으나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헤롯의 교훈을 말씀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외식적이었고, 사두개인들의 교훈은 이성주의적이었고, 헤롯의 교훈은 세속주의적이었다고 본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여러 부류의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교훈들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17-21절]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5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4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두 차례의 떡 기적은 확실한 사건들이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사건들을 다시 확인시켜주셨고 또 후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기적들의 확실함을 한번 더 증거하셨다. 그러나 떡 기적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신적 인격이다. 떡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일들을 포함한 모든 기적들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다면, 그는 그런 기적들을 행하실 수 없었다. 그것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인격을 증거한다.

[22-23절]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예수께서는 벳새다에 이르셨다. 그곳은 떡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다(눅 9:10).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그에게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했다. 그들은 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있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영적 소경인 죄인을 구주 예수께로 인도하는 열심 있는 성도들의 본이 된다. 소경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예수께서는 그 소경의 손을 붙들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적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는 믿음 없는 자들 앞에서는 기적 행하기를 꺼려하셨다(막 6:5-6). 그는 그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다. 그 소경은 비록 볼 수 없어도 무엇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주께서는 아마 그의 눈에 손을 얹으셨을 것이다. 그런 후, 그는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

[24-26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모든 사람](전통사본)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말고 마을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시니라.

그 소경은 우러러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때에는 병자가 보통 즉시 고침을 받았으나 이 경우는 웬일인지 즉시 고침을 받지 못했다. 그 소경은 사람들이 보이지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간다고 말하였다. 그의 눈은 시력을 얻었으나 완전치 못하였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 눈에 다시 안수하셨고 그로 다시 쳐다보게 하셨다. 그 소경은 완전하게 고침을 받았고 만물을 밝히 보았다. 주께서는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 들어가지 말고 마을의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병고침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27-28절]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제자’라는 호칭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268회나 사용되었다.‘제자’는 선생님에게 말씀을 배우며 그를 따르는 자를 가리킨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에서 약 4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도시이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근본적 질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그에 대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참 믿음은 바른 지식과 함께 생긴다.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사람들의 견해를 모르셔서가 아니고 이제 그의 제자들이 자기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선지자나 종교적, 도덕적 선생이 아니셨다.

[29-30절]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해 물으심으로써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알리기를 원하신다. 그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신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혹은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약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견해를 나타낸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사실, 이것이 복음서 전체의 요지이며 성경전체의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맨 처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했다(막 1:1).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요 20:31) 또 사도들이 전한 가장 기본적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행 5:42; 16:3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16:31).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이때 이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적어도 두 번 더 증거하실 것이다(마 16:21; 17:22-23; 20:17-19).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도 말씀하셨다(마 20:17-19).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실 자가 아니고, 많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자이시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하였다(고전 1:23). 그의 죽음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속죄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의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32-33절]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책망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때까지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무지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았지만 고난 받으실 그리스도로는 알지 못하였다.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사는 것만 생각했지 죽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베드로의 최선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였다.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제자는 선생님의 교훈을 믿고 그 교훈을 행하며 그의 본을 따르는 자이다. 그것이 그를 따르는 것이다. 주께서는 이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어떤 환경여건이든지 죽음을 각오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

[35-37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만일 사람이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 한다면, 그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자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확실히 얻는 자이다.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다 얻는다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복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는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누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주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 때(마 24:30) 그를 부끄러워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러 이 세상에 오지 않으셨고,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죽으러 오셨다. 그는 죽음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은 그가 친히 가신 길이었다. 참된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현실이다. 우리는 어떤 환경여건이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행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주의 재림과 영생을 소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