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QT 마가복음 5장 1~43절 거라사광인(혈루증으로 앓는 여인)
[1-4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가다라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가다라인의 지방은 갈릴리 호수 동남쪽 10킬로미터 지점 야르묵 강에 인접한 마을이다. 예수께서 배에서 나오실 때에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그를 만났다. 더러운 귀신은 더러운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사람을 더럽히는 영이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을 끊었다.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었다.
[5-8절]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그것은 일종의 미친 증세이었다. 오늘날도 귀신의 작용으로 미친 자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였다. 악령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그의 신적 권세를 인정하였다. 예수
께서는 과연 영의 세계를 다스리며 악령을 내쫓을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다.
[9-12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그 모든 귀신들이]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그 악령의 이름은 ‘군대’이었다. ‘군대’라는 원어(레게온)는 6,000명 가량의 인원으로 구성된 로마의 부대 단위를 가리킨다. 이렇게 많은 악령들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갔다. 많은 더러운 악령들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힘이 세고 난폭했던 것이다. 그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었다. 돼지는 풀이나 곡식을 잘 먹는다. 그 귀신들은 예수께 간구하기를, 자기들을 돼지 떼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다.
[13-17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2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에게 고하매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께서는 귀신들의 간청을 허락하셨다. 허락하실 권세가 그에게 있었다. 예수께서 한 명의 영혼을 돼지 2천 마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심도 증거되었다. 돼지 한 마리를 40만원만 쳐도 돼지 2천 마리의 값은 8억원이다. 사람의 가치는 돼지 2천 마리보다 크다.
돼지 치던 자들은 도망하여 읍내와 마을에 고하였다. 사람들은 그 일이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나아와 그 귀신 들렸던 사람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해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사람들은 그들에게 고하였다. 이 사건을 본 증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였다. 그것은 2천 마리나 되는 돼지의 손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인생의 참 가치가 무엇인지와 그 불쌍한 사람을 고쳐주신 신적인 구주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 대한 무지(無知) 때문에 그를 영접하며 경배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를 배척하였다.
[18-20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친척들]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일이었다. 그는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고 모든 사람은 기이히 여겼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죄와 사망과 악령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성령의 사람, 곧 바른 정신을 가진 인격적인 사람을 만드신다. 그것은 영원한 죽음과 형벌로부터 영생과 행복으로 이전시키는 일, 곧 구원의 일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크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
[21-24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회당장’은 회당에서 예배를 준비하며 주관하는 자이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존귀한 직분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신분이 높아지면 마음이 교만해지기 쉽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 와서 겸손히 그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딸의 병의 치료를 소원하였다. 그 딸은 열두 살이었고(42절) 외동딸이었다(눅 8:42). 주께서는 그의 청을 즉시 들어주지 않으신 것 같다. 그러나 그 회당장의 믿음은 컸다. 그는 예수께서 죽게 된 자기 딸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그 딸이 살게 될 것을 믿었다. 그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믿은 것이다. 또 그는 금방 허락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많이 간구하였다. 마침내 그의 간구는 응답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그 회당장의 요청대로 그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셨다.
[25-26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우사 엔 뤼세이 하이마토스)[피가 흐르는 상태에 있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열두 해를 피가 흐르는 상태에 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것은 피가 흐르는 병, 유출병, 출혈병이었다(레 15:2). 그는 많은 의원들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 좋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녔고 좋다는 약을 다 복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효험이 없었고 도리어 더 심하여졌다. 12년 동안 그러했으니 몸도 마음도 몹시 쇠약해졌고 돈도 많이 허비하였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오늘날도 의술과 약이 유익하지만 여전히 완전하지 못하고 치료의 한계성을 가진다.
[27-29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그 여자는 감사하게도 예수께서 많은 불치의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또 그뿐 아니라, 그의 속에는 믿음이 생겼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마지막 희망을 발견하고 그에게로 나왔다. 그런데 많은 무리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어서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는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기가 부끄러웠을 것이지만,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참된 믿음은 어떤 고정된 신앙고백으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말랐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다. 그는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았다.
[30-33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도 그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아셨다. 또 그는 자기의 옷에 손을 댄 여자가 있음을 아셨고 그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백하였다.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 여자의 믿음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불치의 병의 고침을 받았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원리는 병 고침에서나 영혼 구원에서나 비슷하다. 12년된 불치의 혈루병을 고쳐주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도 도덕적으로 불치병자와 같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35-36절]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즉시](전통사본)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 가시는 중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통보가 왔다. 그가 예수께 간청한 일은 불가능하게 된 듯했다. 사람들은 딸을 위한 그의 간청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하는 말을 즉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야 할 까닭은 병든 자를 고치실 수 있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자가 그와 함께 있으시고 그가 그의 딸을 살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37-39절]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떠들석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 세 제자는 예수님의 최측근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실 그 현장에 있을 산 증인들이었다. 죽음은 과연 사람들에게 가장 슬픈 일이며 사람에게 어찌할 수 없는 원수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 앞에서 안정을 잃고 슬퍼하며 소동한다.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생의 끝으로 본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이 생의 끝이 아니고 부활이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 아이를 잔다고 표현하셨다. 죽음은 자는 것과 같고 부활은 깨는 것과 같다. 주께서는 이제 그 아이를 깨우실 것이다. 또 그는 마지막 날에 모든 죽은 사람들을 깨우실 것이다.
[40-41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탈리다 쿠미](전통본문)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비웃었다. 그들이 비웃은 까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누구신 줄 알았다면 그들은 그의 말씀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제한된 생각으로 주님과 그의 말씀을 판단하고 멸시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어보내신 후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셨다. 그들은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탈리다 쿠미”(전통본문). 그것은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이다. 이것이 주께서 그 죽은 소녀를 깨우신 행동이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쉬웠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실 때 빛이 있었듯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으셨다.
[42-43절]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그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즉각적 효력이 있었다. 이것은 신적 능력이었다. 이것은 그의 신적 인격의 증거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그 이상이셨다. 그가 사람이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다. 그 속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셨다(골 2:9).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셨다. 그 까닭은 병고치는 일이 그의 사명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께서는 단지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육체적, 물질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더 근원적인 영혼의 죄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또 해결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일반적 자연법칙을 인정하셨음을 보인다. 사람은 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 자연법칙으로 산다. 기적은 역사상 특별한 경우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지 성도의 일상적 생활법칙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적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기적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은 건강을 위하여 영양 있게 소식(小食)을 하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적당히 잠을 자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의약적 처방도 감사히 사용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를 고쳐주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먹은 외동딸을 살려주셨다. 이 일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물론 그는 단지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은 그의 딸의 치료를 위해 예수께 간절히 구하는 행위로 나타났고,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의 믿음은 무리 속을 헤치고 예수께 접근하여 그의 옷이라도 만지려고 한 행위로 나타났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오늘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죄를 멀리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며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