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신약) QT/마가복음

오늘의QT 마가복음 2장 1~28절 죄인을 부르러 오심(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

nice365 2021. 6. 28. 10:12

[1-4절]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는 모여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그는 주로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셨다. 구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죄인을 구원하신다.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인도되었다. 중풍병은 뇌혈관이 터지거나 막혀 팔이나 다리 등의 신경이 마비되는 병이다. 세상에는 많은 병들이 있고 많은 불행한 일들이 있다. 그것들의 궁극적 원인은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사람의 모든 불행의 해결책이 있다.

[5-7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죄와 질병이 관련이 있음을 보인다. 욥이나 바울의 경우와 같이, 어떤 특정한 병이 특정한 죄의 결과가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병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죄가 없었던 세상에는 병도 없었다. 질병의 원인이 그렇다면 그 해결책도 분명해진다. 죄사함이 그 해결책이다. 죄사함은 실상 사람의 병뿐 아니라 사람의 모든 불행의 해결책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다.

[8-12절]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그의 영으로]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께서는 그 서기관들이 속으로 품은 생각을 그의 영으로 아셨다. 그의 인성(人性)은 신성(神性)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적 지식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사람의 속을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는 일어나 곧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 사람들 앞에서 나갔다. 예수께서는 죄사함에 근거하여 그 병자의 중풍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불치의 병들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일들을 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3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이 레위는 마태복음에 증거된 마태일 것이다(마 9:9-13). 세리 즉 세무 공무원은 부정과 불법이 많은 직업이었고 죄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주목하셨고 사역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의 관심, 그의 생각, 그의 의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그 일을 위해 사역자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레위는 주 예수님의 부름을 받자 일어나 그를 좇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복음의 일꾼은 주 예수님을 따르는 자, 곧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는 자이어야 한다.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예수께서는 늘 바쁘셨겠지만 사람들과 함께 음식 잡수시기를 피하지 않으셨다. 주와 함께 식탁에 앉은 세리들과 죄인들은 레위의 친구들로서 레위의 전도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자기가 의롭고 자기의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위선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지만, 많은 죄인들은 그를 따랐다. 자기의 죄를 깨닫는 것은 믿음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다.

[16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전통본문) 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서기관들은 주로 바리새인들 중에 있었다(행 23:9)(NBD). 그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가 의인이라면 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가? 그들은 이것을 죄인들과의 교제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혼의 구원과 전도의 차원에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것이었다. 교제의 차원과 전도의 차원은 구별되어야 한다. 더욱이, 주님과 함께 식사한 자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 자들이었다. 회개하고자 하는 진실한 죄인들이 실제로 악을 행하면서도 의인인 척하는 위선자들보다 구원에 가깝다.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전통사본) 왔노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5:32도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세상에 오셨다.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요, 죄사함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가장 놀랍고 감사한 선물이시며, 죄인인 모든 사람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보다 더 복되고 감사하고 감격적인 일은 없다.

[18-20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바리새인들의 제자들](전통본문)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메시아의 오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습관을 따라 금식을 하였다고 본다. 그들은 메시아께서 오셨으나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록 금식하지는 않았지만,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단지 종교적 형식만 지키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신약시대에 금식이 불필요하거나 폐지된 것은 아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음을 지적하신 후 마가복음 9:29 전통본문에 보면,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금식 기도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이다. 신약성도는 언제든지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생겼을 때 자원함으로 금식하며 기도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21-22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 아래서의 옛 생활방식을,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 가죽부대와, 또 암시된 바, 새 옷은 복음 아래서의 새 생활방식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신약 아래서 우리가 어떤 법적 규정에 얽매여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자유함과 자원함으로 섬겨야 함을 암시한다. 로마서 7:6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율법의 속박과 공포로부터의 자유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롬 7:6; 갈 5:1).

[23-24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한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다. 밀 추수 때이었던 것 같다. 마태복음 12:1은 그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매우 경건하고 보수적이게 보였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했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남의 밭을 지날 때 이삭을 자른 것은 죄가 아니며 율법이 허용한 것이다(신 23:24-25). 단지 안식일에 행한 그 행위가 문제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25-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궁핍하여 배가 고팠을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차려놓은 떡]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한 사건을 들어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답하셨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할 때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간 때가 있었다.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로서 성경 역사에서 그 부친보다 더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신 것 같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제사장은 그들에게 성전의 거룩한 떡을 주어 먹게 하였었다. 이 일은 구약의 의식법에 저촉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비상한 때에 부득이한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큰 죄로 여기지 않으셨고 다윗과 그 일행들을 용납하셨다. 이와 같이, 이번 경우에도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삭을 잘라먹었겠는가 하고 이해한다면 큰 비난거리가 될 것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27절]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디아)[때문에]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은 사람 때문에,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 때문에,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의 목적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씀이다. 모든 율법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며(신 10:12-13), 안식일 계명도 그러하다. 안식일 규례는 사람의 육신적 휴식과 영적 성장을 위해 주신 좋은 규례이었다. 출애굽기 23:12, “너는 6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7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실상,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 평안과 건강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안식일의 참 의미를 이해한다면, 상대의 사정을 고려치 않고 그의 행위를 단순히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생명을 구하는 일이나 의식주에 관한 부득이한 행위는 정죄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28절] 이러므로 인자(人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안식일에도 주인이 되신다.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지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참된 안식과 자유가 있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의 복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다. 주일은 휴식과 예배의 날이다. 우리는 이 날 오락과 세속적 일을 금하고 교회로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린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안식일을 즐거이 지키지만, 남의 어려운 형편을 동정함이 없이 그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