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의 번역된 성경들
1). 역대의 번역된 성경들
마틴 루터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한 진리의 투사를 세우셨다. 그의 이름은 존 위클리프이다. 그는 후에 개신교 종교개혁의 샛별로서 불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손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중세 암흑 시대의 신비주의 사상을 퇴치하는 불길을 지피셨기 때문이다.
위클리프 생애의 주된 업적은 AD 1380년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개신교회사가 이자 신학자인 네안더는 당시에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어떤 두려운 일도 견딜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였다고 말하였다. 성경을 평민의 언어로 번역한 위클리프의 행위는 당시의 가장 강력한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세력에게 항거하는 것이었다. 존 위클리프가 대중에게 성경을 제공하는 것을 반대한 로마 천주교회 말이다.
위클리프는 무덤에 잠들었다. 그러나 43년이 지난 후에 AD 1428년 콘스탄트 회의 결의로 로마교도들은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고 그의 유골을 꺼내 태워 근처 시냇물에 던졌다. 시냇물은 그의 재를 대양으로 옮겼고 오늘날 그곳은 위클리프의 교리가 전 세계적으로 퍼졌음을 기념하는 곳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대항하는 자들의 증오심을 사용하시어 그분의 충성된 종 위클리프가 죽었음에도 그의 영향력이 영원하도록 하셨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존 위클리프는 개신교도이다.
1. 최초의 성경; 존 위클리프의 성경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존 위클리프이다. 그는 1392년 영국의 북부지방 요크셔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명문 옥스퍼드대학에서 특대 교비 연구생으로 공부하였다. 당시의 성경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고어(古語)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진리의 근원으로 나아갈 방법이 있었으나 무지한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위클리프는 학교에서 학과를 공부하는 것 못지 않게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얻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1345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위클리프는 모교의 신학 교수로 초빙되어 강단에서 강의와 목회를 하게 되고 거기서 학장까지 지내게 되었다.
중세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성직자 계층으로 되어 있었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법은 성경이지 교황이 자의적으로 만든 법이 아니라고 강하게 교황의 권위에 맞섰다. 로마 교회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위클리프의 온 생애를 통하여 최대의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아주 적은 부수의 성경밖에 없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더욱이 유식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언어로 여러 시대 동안 기록되어 있었다. 위클리프는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오랫동안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여 드디어 위클리프의 말대로 최초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권세있는 귀족들과 영국 왕의 비호 아래에서 위클리프는 과감하게 성경의 첫 번째 번역판을 만들어내었다. 만일 귀족들과 왕의 지지가 없었다면 그는 화형대 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평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교회에 대한 반역행위로 간주되었다.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과 교황권의 성직자들에 의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는 그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은 많은 잘못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는 5세기경에 제롬에 의해서 편찬된 라틴어 벌게이트(Latin Vulgate)성경, 즉 로마 천주교회가 사용하던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성경으로 인해 로마 천주교회가 평민들에 대해 쌓아 놓았던 높은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결코 소멸될 될 수 없는 빛이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성경은 영국 전국에 공개 되었고, 성경이 번역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위클리프는 감옥이든지 화형주든지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는 결코 꺼질 수 없는 진리의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성경을 줌으로 무지와 죄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 이상의 것을 줄 수 있었음을 기뻐했다.
에라스무스(Érasme, 1469년-1536년)네덜란드 출신 에라스무스는 로테르담에 살면서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나 학자, 인쇄공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전 지역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애 가장 큰 업적은 헬라어 신약성경을 다섯 번(1516년, 1519년, 1522년, 1527년, 1535년) 번역하고 라틴어 번역을 출판한 것이다.
그는 1516년 바젤에서 헬라어 본문을 그가 알고 있던 새로운 라틴어로 번역 출판하게 된다. 이 번역은 유럽에서 모든 번역의 기반을 제공한다.
에라스무스는 그의 신악성경 서문에 “나는 모든 여인들이 복음서를 읽고 그리고 바울의 서신서를 읽을 수 있었으면……, 그리고 이 본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되기를 소원한다”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그는 성경이 특별한 전문가들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읽고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바로 평범한 대중들이 아니었습니까? …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화를 내실까요? 저는 농사꾼들을 물론이고 대장장이와 석공들, 심지어 창녀나 포주, 터키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저 역시 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다섯 번에 걸쳐 출판하게 된다. 이것은 이전의 라틴어 성경 <제롬 라틴 불가타>와 상반된 해석과 주석을 달고 있었기에, 천주교 내부에 많은 논란과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제롬 성경은 마태복음 4장 17절에 대하여 “고해성사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번역한 데 비해, 에라스무스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왔으므로 회개하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번역은 학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과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이 설명한대로의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
2. 에라스무스의 성경
1516년,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표준 원본을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 성경을 만들었는데, 이 성경에서 로마 천주교회가 사용하던 라틴 벌게이트 성경의 많은 잘못된 점들이 올바르게 교정되었다. 이 성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운명을 성경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자들에게 의지하는 영적인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이 성경의 신약 역본 주석에서 그 당시 신학자들의 잘못된 성서 해석과 형식화된 논리를 공격적으로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당시의 신학자들은 마음대로 밀가루 반죽 이기듯이 성서를 뜯어 고치고 거기서 나온 그들의 결론만이 유일불가침의 것임을 인정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이 성경은 1516년에 많은 부가설명과 주역을 달아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것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틴데일 보다 앞서 처음으로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던 위클리프는 성경의 개념을 표현할 영어단어가 없어 고심하던 끝에 여러 단어들을 만들거나 조어(造語)하기도 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구속’이라는 뜻의 단어 아톤먼트(Atonement)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한 순간’ 우리를 구속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한 순간’이라는 의미의 At one movement를 합성하여 Atone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틴데일도 성경 원전(原典)의 개념을 바르게 전달하고, 또 성경을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여러 단어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문설주에 피를 바른 곳은 재앙이 지나갔다는 점에 착안하여 유월절을 의미하는 Passover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그가 조어한 경우로는 ‘화평케 하는 자’를 Peacemaker로, ‘오래 참음’을 long-suffering으로 사용하였고, 창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아름다운’(beautiful)이란 단어를 만들었다. 특히 틴데일은 하나님을 칭하는 단어로 Jehovah(여호와)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영어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였다. 그는 하나님을 칭하는 히브리어 야훼를 영어식으로 음역했던 것이다. 텐데일의 성경은 1611년에 공인된 성경으로 출판된 흠정역(KJV)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틴데일의 성경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c. 1494-1536)은 영국의 종교개혁가이자 영어 성경번역가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위해 당시 영어에는 없는 새로운 여러 단어들을 만들고 구어적인 소박하고 우아한 영역성경을 출판함으로써 후일 흠정역(KJV)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아는 이는 많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다는 점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얼마나 숨 막히는 암흑의 세월이었던가를 짐작하게 된다. 바로 그 암흑에서 자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국어로 번역되고 읽혀져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는 성경번역가의 길을 갔고, 성경 출판은 아무도 기꺼이 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 출판업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번역은 당시 교회에서 칭송받을 일이 아니라 금지된 일이었으므로 조국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함부르크와 비텐베르크를 오가며 비밀히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구약의 일부, 곧 창세기에서 역대상까지의 일부, 요나서와 신약을 번역했고, 1525년 퀘른에서 최초로 신약성경을 비밀히 인쇄했다. 인쇄공의 배신, 도피, 경제적인 어려움 등 숱한 방해와 난관 가운데서도 그는 비밀히 인쇄한 성경을 출판했다.
그는 번역한 성경을 영국으로 수출되는 술통과 밀가루, 혹은 짐짝 등에 숨겨 영국으로 반입했다. 그러나 밀반입된 성경이 영국교회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1525년에서 1528년 사이에 신약성경 18,000권이 소각되고 현재는 단 2권이 남아 있다. 영국에서 소각 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틴데일은 화란 안트웹으로 피신하여 숨어 있으면서 신약번역본 수정작업을 했고, 구약 모세 오경을 번역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국교회의 비밀요원 헨리 필립스(Henry Philips)의 제보로 체포되었고 헨리 8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심문을 받고 1536년 최고형인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는 그가 공인된 라틴어 판 벌게이트(Vulgate)를 사용하지 않고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에서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린 그의 시신은 화형용 기둥에 묶여져 다시 불태워졌다. 윌리엄 틴데일이 번역한 틴데일역(Tyndale’s Version, 1524-34)은 원어성경을 대본으로 사용한 최초의 번역 성경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인쇄된 최초의 영어성경이라는 점에서 영어성경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가 헬라어 원전 신약 성경을 영역할 때는 에라스무스에 의해 헬라어 성경이 출판된 지 불과 9년이 지났을 때였다. 틴데일의 성경은 1611년에 공인된 성경으로 출판된 흠정역(KJV)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534년 캔터베리 성직자회의(Canterbury Convocation)는 영어 번역 성경 을 펴내기 위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경로를 따르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 다. 한편 틴들의 동료인 마일스 커버데일(Myles Coverdale, 1488-1596년)은 그의 멘토의 작업을 확장하였다. 첫 완역본은 1535년에 인쇄되었는데 원어 에서 옮긴 것이 아니라, 표지에 따르면 “독일어와 라틴어에서 영어로 충실 하고 진실하게 번역”되었다. 신약과 오경과 요나서는 틴들의 번역을 기초 로 삼았다. 커버데일은 해설과 소개글을 많이 추가하였는데 주로 개신교의 입장을 견지했다. 외경들은 따로 모아서 구약 다음에 두었다. 종교 개혁에서 비롯된 가끔은 종잡을 수 없는 교회의 발전 과정, 그리고 그것과 얽혀 있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커버데일은 잉글랜드와 유럽 본 토를 자주 오가야 했다. 헨리 8세에 맞서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도 그러했다. 커버데일의 번역은 앤 불린(Anne Boleyn) 왕비가 좋아했음에도 끝까지 공인되지 못했고, 성경의 소유와 사용은 상류층에만 국한돼야 한다는 헨리 8세의 1546년 칙령도 피하지 못했다. 커버데일의 번역을 포함하여 많은 역 본들이 불에 탔다.
4. 마일스 커버데일의 성경
틴데일이 이단으로 처형된 지 약 10년이 지난 후 마일스 커버데일(Coverdale, 1488-1596)은 틴데일역을 좀 더 보충하여 1535년 최초의 완역판 영어성경을 출판했는데 이것이 커버데일 역(Coverdale Version, 1535)이다. 이것은 번역판이라기보다는 틴데일역의 수정판에 가깝다.
2). 성경의 수난 시대와 핍박의 역사
1538년경, 모든 성직자는 교회 안의 편리한 장소에 영어로 된 성경 한 권을 비치해야 한다는 법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 강력한 교권의 압력으로 인해서 국회는 다시 한번 틴데일 성경을 법으로 금지시켰으며, 성경은 또 다시 평민들의 손으로부터 제거당해야만 하였다. 또 로마 천주교인인 영국의 메리 여왕 시대 동안에는 마태 성경의 편집자들인 토마스 크래머와 존 리절을 포함하여 수백 명의 신실한 개신교도들이 화형대 위에서 연기로 사라졌다.
그런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때에는 개신교가 복구됨에 따라서 다시 성경은 대중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560년경 틴데일 성경의 개역본인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메리 여왕 시대의 박해를 피해서 제네바로 피신한 개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네바 성경은 많은 부분이 올바르게 번역되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읽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상당한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영국 교회의 형식주의를 거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거절과 저항은 청교도들과 영국 국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가져오게 했으며, 이러한 핍박은 그들로 하여금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신세계인 미국으로 이주하도록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 때에 또 다른 중요한 성경이 영국 교회의 주교들에 의해서 등장했다. 이 성경은 1568년에 여왕에게 바쳐진 것으로서 비숍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청교도 운동이 강력하게 펼쳐져서 1593년에는 영국 교회에 의해서 그들을 “불충성한 사람들”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고, 그들에게는 영국을 떠나라는 추방명령이 내려졌으며, 이에 불복하는 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3). 킹 제임스 성경의 탄생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킹 제임스 6세가 그 후계자로 선정되어 대영 제국의 제임스 1세 왕(King James)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총력을 기울여 새로운 왕에게 그들의 처지를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런던으로 즉위식을 거행하러 가는 도중에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자세히 기록한 “밀리너리 청원서”를 왕에게 전달하게 되었다.
1. 킹 제임스 성경 편찬
1604년 1월 14일, 제임스 1세 왕 (킹 제임스 1세)은 영국 국교의 주교들과 존 레이놀드가 이끄는 4명의 청교도 지도자들,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의 학장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왕은 새롭고 보다 정확한 성경을 편찬해 낼 것을 결정하였다. 킹 제임스 1세는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었다. 그는 고전 언어에도 능통하여서 요한계시록을 해설하는 글을 쓸 정도였으며, 또한 시편의 일부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왕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될 번역자들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주의깊었는데, “성경을 개인적으로 연구하는데 있어서 고통을 감수했던”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 번역자들을 선택하는 자격 조건이었다. 이 역사적인 놀라운 사명을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은 당시 청교도들의 지도자이었던 존 레이놀드 박사를 포함해서 모두 47명이었다.
2. 킹 제임스 성경 편찬 과정
이 엄선된 47명의 사람들은 이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금전적인 댓가도 받지 않을 정도로 경건한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편찬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번역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여섯 팀으로 나누어 일하기로 했다. 그 여섯 팀은 크게 두 그룹으로 대변할 수 있었는데, 한 그룹은 히브리어에 정통한 전문가들로서 이들은 구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또 한 그룹의 사람들은 헬라어의 전문가들로서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다. 3년에 걸쳐서 각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할당된 부분을 번역하였는데, 이때 그들은 번역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정한 15개 항목의 번역의 원칙을 준수해야 되었다.
두 번째 단계로서, 각자가 번역한 성경을 자신이 속한 팀의 다른 사람이 번역한 것과 비교하는 작업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한 팀에서 자신들에게 할당된 번역이 완성되었으면 그것을 다른 두 팀으로 보내서 다시 비교 검토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작업 끝에 감추어졌던 성경이 펼쳐지자, 틴데일과 커버데일이 끼친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던가가 분명히 드러났다. 커버데일은 “산문의 대가”였고, 킹 제임스 성경은 커버데일 주교의 문학적 특출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제임스 왕의 주도하에 착수되었던 성경 전체의 번역이 일단 완성되자, 각 팀에서 두 명의 학자들이 차출되어서 마지막 교정과 검토에 들어갔다. 그들은 한 사람이 자신들이 번역한 성경을 크게 소리내어 읽으면 다른 학자들은 다른 언어, 즉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 된 성경을 듣고 보면서 자신들이 번역한 영어 성경을 재검토하였다. 만일 그들이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모두 함께 모여서 그것에 대하여 토의를 하였다. 가장 정밀한 검토의 과정을 거친 후에 새로운 번역본은 인쇄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런 검토와 확인의 과정을 거치는데 총 9개월이 소모되었고, 그 당시의 낙후된 인쇄술에 의해서 드디어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은 대중들의 손에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3. 킹 제임스 성경의 개정
초판이 독일에서 유래된 고딕 활자체였기 때문에 보기가 난해하여 1612년 판에는 로마체가 적용되었습니다. 이후로 1629년 첫 번째 개역이 있었고, 이어서 1678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좀더 상세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762년 캠브리지 트리니티 대학의 토마스 파리스 박사는 킹 제임스 성경의 개정본을 만들었다. 또 7년 후 1769년에는 옥스포드 대학의 벤쟈민 블레이미 박사에 의해서 다시 한번 개정판이 나왔는데 4차례 교정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초판본의 400 군대쯤 있던 본문의 교정 중 72%가 그때에 완료되었습니다.
초판과 1769년판까지의 차이는 문법과 철자의 대문자와 소문자 차이가 주를 이루고, 내용적 차이는 없습니다. 활자체 변화는 단지 본문 내용이 아니라 글씨 형태와 크기를 바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정 작업한 것을 수정했다고 오인을 하기도 하지만, 교정과 수정은 엄연히 다릅니다.
교정(矯正) : 틀어지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
수정(修正), 변경, 개정 : 바로잡아 고침.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편히 앉아서 읽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위대한 개혁자들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가 화형대 위와 고문대에 바쳐지는 숭고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성경의 보존을 위해 자신들의 생애와 목숨을 바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정신을 마음에 품은 채 성경을 대한다면 우리는 좀더 성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