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 1~39절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심(말뿐임, 존경받기를 좋아함, 천국의 방해자)
[1-3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모세의 자리’는 선지자의 자리이다. 모세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었다(신 34:10).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고 선포하고 전달하는 자이다. 오늘날 목사도 그러하다. 비록 성경에 전적으로 의거해야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 선포자, 전달자의 자리에 있다.
야고보서 2:26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런 위선자의 바른 말은 들을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한다.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위선적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만 사람들의 어깨에 지운다. ‘무거운 짐’은 하나님의 율법들에 근거했다고 주장되는 규칙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율법의 역할이 사람들로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여 그들로 절망과 좌절을 느끼게 하여 구주 예수께서 나오게 하는 것이지만, 종교가 외식에 떨어질 때 규칙들과 규례들만 많아질 것이다.
[5절]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신명기 6:8에 율법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찼다. 경문(經文)은 이마와 팔과 허리에 차는, 성경구절들이 쓰인 가는 양피지 띠를 가리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더 경건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참 종교는 형식이 아니고 실질이며, 외모로 함이 아니고 진심으로 함이다(신 6:5; 잠 4:23; 딤후 3:5).
[6-7절]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10절]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전통사본(Byz syrc 등)에는 8절에 “너희 선생은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되어 있다. 랍비, 아비, 및 지도자라는 명칭은 다 종교적 지도자를 가리켰다고 보인다. 우리들의 선생님과 영적 아버지와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11-12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세상에서는 큰 자가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천국과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마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는 자들로서 직분이 중해지면 중해질수록 더욱 자신을 낮추어 주님처럼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겸손과 섬김은 영적 성숙의 표가 된다.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반 백성들에게가 아니고 부패한 지도자들에게 노하셨다. 마태복음 5장의 8복(福)과 대조적으로, 그는 위선적 지도자들에게 8화(禍)를 증거하였다(전통본문의 14절을 포함하여).
외식자들의 한 특징은 천국문을 가로막는 것이다. 천국은 사람들의 가장 큰 목표와 소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로부터 영생과 천국을 약속하셨다(딛 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천국의 문이시다. 참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것은 천국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식자들은 천국의 안내자가 아니고 천국의 방해자 곧 천국문을 가로막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1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과부들의 집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더 큰 심판을 받으리로다](전통본문).
[15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외식자들은 교인수 늘이는 데 열심을 가졌다. 참된 신자들의 수효의 증가가 아니라면 무의미하다. 외식자들은 알곡 운동이 아니고 쭉정이 운동을 했고 얻은 교인들을 자기들보다 배나 더 부패하고 외식하는 지옥 자식이 되게 했다.
[16-22절]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성전과 제단보다 제단에 바쳐진 헌금과 예물을 더 중시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탐심을 헌금이라는 종교적 형식에 감추었다.
[23-24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cummin)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것들은 향료들이었다. 이것은 땅의 소산물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레 27:30). 그러나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행하는 것이며, 인(仁)은 자비와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신(信)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 관계의 신실성도 포함된다. 선지자 미가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미 6:8).
[25-26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불의](전통본문)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외식자들은 외적 성결을 중시했으나 그들 안에는 탐욕과 불의로 가득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성결이다. 마음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한다. 마음에 가득한 것은 말과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 내면적 성결이 없는 외적 성결은 가치가 작고 위선(僞善)에 그칠 수 있다.
[27-28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9-3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므네메이온)[혹은 무덤]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36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주께서 그의 종들과 성경 교사들과 해석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실 때 그들은 그들을 죽이고 때리고 핍박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것이다.
[37-39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여러 번 예루살렘을 감싸려 하셨으나 예루살렘 거민들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 성은 최종적 회복의 때까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주의 재림의 때에 세상은 공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세상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영광스러운 회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이다(계 21:1-2).
우리는 외부적 성결보다 내면적 성결을 중시해야 한다. 외식자들은 위생적 성결은 지켰지만, 심령에는 탐욕과 불의가 가득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면적 성결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우리는 지옥의 판결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천국 백성으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