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장 1~35절 겸손과 용서를 가르치심(1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 비유)
[1-3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절]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9절]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소자’는 그를 믿는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기독교는 인격적 종교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어른의 생명이든 아이의 생명이든 혹 태아의 생명이든 동등하게 귀하다.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은 비인격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그것이 어린아이의 인격일지라도, 업신여기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여기시고 그들의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옵기 때문이다.
[11절] 인자(人子)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왔노라(전통본문).
[12-13절]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5절]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책망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주께서는 우리가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그에게 충고하고 책망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만일 그가 들으면 우리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성도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을 보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세 번째 단계는,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는 것이다. 교회에 말한다는 것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에게 말하거나 또 기회가 있다면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만일 그 범죄한 자가 교회의 판단 즉 당회의 판단이나 회중의 판단도 듣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와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그는 교인으로 여겨 사랑의 교제를 나눌 대상이 아니다. 그는 교회 밖에 있는 외인(外人)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20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문맥적으로 교회적 권징에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두세 사람이라도 바른 판단과 합심된 소원은 효력이 있다는 말씀이다. 지교회의 당회(목사와 장로들의 회)가 결정한 권징이나 회중이 결정한 권징, 또 노회나 총회가 결정한 권징은 만일 그것이 성경적으로, 양심적으로, 이성적으로 정당성을 가진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효력 있는 권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합심기도의 일반적 교훈이기도 하다고 본다. 성도들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을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것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개인의 기도도 힘이 있지만,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더욱 힘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두세 사람이 그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그들 중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주께서는 더욱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
[21-22절]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형제가 우리에게 무슨 잘못을 범한 후 그것을 사과하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 물론, 용서는 상대방의 사과와 회개를 전제한다. 만일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말도 무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앞절들에서 형제가 사과하지 않을 경우 권징의 절차를 따라 행하고 만일 그가 교회적 권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교제를 끊으라고 교훈하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단지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고 사과만 하면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다. 상대가 진심으로 사과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를 언제든지 용서해야 한다.
[23절]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 천국을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24-27절] 회계할 때에 1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었다(한 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약 5그램이었다)(NBD).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마 20:2), 그것을 오늘날 품삯으로 10만원만 치더라도, 한 달란트는 약 6억원이며, 1만 달란트는 약 6조원이 된다.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나 그 빚은 한 개인이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다.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명했다. 그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말했지만, 빚을 갚을 가능성은 없었다.
주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의 과거의 영적 처지를 암시한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의 죄의 빚은 스스로 갚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죗값은 지옥 형벌이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주신 구원이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얻거나 행위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은혜의 구원이다.
[28-30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종은 나가서 그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1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00일 품삯에 해당한다. 그것은 물론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1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동료를 붙들어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했다. 그 동료가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말하며 엎드려 간청하였으나, 그 종은 그 동료의 청을 허락지 않고 그가 빚을 갚도록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는 자기가 주인에게 1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큰 은혜를 기억하였다면, 그는 100데나리온 정도의 빚은 기꺼이 탕감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할 근거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1만 달란트의 빚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비유하며, 100데나리온의 빚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을 비유한다. 하나님께서 1만 달란트의 빚과 같은 우리의 죄, 곧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죄를 용서해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그것이 어떤 큰 잘못이라 할지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31-34절] 그 동관들[동료 종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동료 종]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 종의 동료들은 그가 용서치 않음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였고, 주인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다. 그 종은 그 주인에게 긍휼을 입은 것과 같이 그 자신도 그의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었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우리는 마땅히 서로 긍휼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께서는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것은 참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다. 용서는 우리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칠 때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었다(마 6:14-15). 사도 바울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32).
하나님께서는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 즉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했던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은 우리 스스로 갚기 불가능했다. 우리는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고 천국에 들어가기에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치 않으실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범하는 형제의 잘못은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100데나리온의 빚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탕감받은 1만달란트 빚에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만 한다.